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김통정 장군의 넋을 기리며

김창집 2007. 1. 3. 09:22

   -- 애월읍 붉은오름 답사기

 

 * 소나무 숲으로 나 있는 길 

 

▲ 날이 좋아서 선택한 오름

 

 2006년 12월 31일 일요일 맑은 후 흐림. 지난 주 나인브릿지 골프장으로 돌오름을 다녀오면서 "올해의 마지막 산행은 붉은오름에 갔으면 좋겠다."는 회원들의 제안에 "날이 맑거든 가봅시다." 했는데, 겨울 날씨로는 산행에 좋은 날이다. 1100도로 영송(靈松)이 있는 길옆에 차를 세우고 가면 쉽게 갈 수 있겠지만, 한라산국립공원에 속하는 곳이라 천아오름 옆으로 가기로 하고 8명의 회원이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출발했다.

 

 아주 오래 전에 두 번 다녀온 기억이 있는데, 그 때는 이곳이 통제되지 않아서 1100도로 휴게소 북쪽 안테나 밑에 차를 세우고 수도관 묻은 곳을 따라 급경사를 내려가 삼형제 큰오름 옆을 스치며 늪지로 통해 노로오름에 다녀오면서 이 붉은오름에 들르고, 살핀오름을 가로질러 다시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오름이 꽤 가파랐다는 느낌과 능선에 올라서면 한라산 쪽과 노로오름 쪽으로 터진 능선이 있었다는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날 정도다.

 

 1100도로 노리손이 못 미쳐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이 갈리는 곳에 까마귀가 대여섯 마리 몰려 있어 다가서 보니, 어린 노루 한 마리가 죽어 넘어져 있어 그를 뜯어먹고 있었다. 너무 불쌍해 조심 못하고 마구 달리다 쳐버린 사람을 원망했다. 천아오름 수원지에 차를 세우고 서쪽 숲을 통과해 천아오름으로 가려다 괜히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바로 쳐 오르기로 하고 앞장서 내를 건넜다.

 

 * 중간에 만난 작고 아름다운 냇가의 샘

 

▲ 오름과 내를 번갈아 건너

 

 이 내는 산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큰 무수천(외도천)의 한 줄기인데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흐르다 이곳에서 결국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눈이 쌓여 있는 데다 가파르기까지 해서 간밤에 세 곳의 망년회와 모임에서 술잔이나 마셨더니, 장난이 아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표현은 않았지만 끙끙 대며 따라오는 회원이 몇 있다. 그래도 5∼6㎜ 정도로 쌓인 눈을 밟고 가는 기분은 그만이었다.

 

 가시덤불과 돌이 눈 속에 묻혀버려 걷기에 아주 편한 것이다. 우리가 오르는 곳도 제법 산체가 크고 높아 오름 이름을 붙여도 좋겠다고 했으나 분화구가 발견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다 못 올라와 허덕이는 회원들을 위해 쉬기로 하고 그 틈을 이용해 각반을 찼다. 내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걸어도 붉은오름은커녕 천아오름도 볼 수 없어 일단은 약간 서쪽으로 기울여 천아오름에 가서 붉은오름의 방향을 확인한 후 가기로 했다.

 

 내를 건너는데 아주 경치 좋은 곳이어서 잠시 쉬었다. 기념 사진까지 찍고 남서쪽으로 틀어 가다보니 드디어 천아오름이 보이고, 숲으로 제법 큰길이 나있다. 아침에 오토바이가 다녀간 바퀴 자국이 눈 위에 확연하다. 게다가 바로 남쪽 방향이어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과는 달리 소나무가 제법 자란 숲이어서 정감이 인다. 불과 10분 정도 걸으니 가로로 큰 찻길이 나타난다. 바리메로 들어와 안천이 쪽에서 들어온 길로 전에 이곳에 차를 세우고 노로오름에 다녀왔다고 한다.

 

 * 주목(노가리)과 조릿대 우거진 오름을 오르며

 

▲ 갈수록 눈의 양은 많아지고

 

 오름 지도를 보면 천아오름 남쪽에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붉은오름이 있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가다 붉은오름이 보이면 곧바로 쳐서 가도 되겠다 싶어 그냥 올라가려는데, 그 곳은 노로오름 다녀온 길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더 가야 한다고 해서, 찻길이 남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면 큰길로 통하는 길이 있을 것 같아 동쪽으로 나아갔다. 넓은 길은 얼마 안가 끊어지고, 내를 지나는 옛날 좁은 길이 이어진다.

 

 길을 따라 내를 건넜는데 길은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나 있길래 이건 아무래도 아니다 싶어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확인해 본즉 너무 동쪽으로 치우친 감이 있다. 이제 돌아가긴 그렇고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가다가 우리가 오르려고 하는 곳과 올라가려던 길이 마주치면 올라가려고 했다. 앞장서 한참 동안 가다가 내를 지나는데 경치 좋은 곳이 있어 쉬면서 살펴보니 앞에 거무스름한 것이 보여 붉은오름임을 직감했다.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확인해본즉, 바로 정남쪽에 붉은오름이 '떡'하게 버티고 있다. 이젠 안심이다 싶어 바로 오름을 향해 신나게 나아갔다. 다래나무 줄기가 이곳저곳에 많아 이것이 익을 무렵에 다시 오자는 회원도 있다. 고지가 높아졌는지 가끔씩 노가리(주목)가 섞인다. 오름 바로 밑 능선에서 마지막으로 쉬어 가기로 하고, 작은 귤 한 알과 구 박사가 강화도에서 가져온 고려 홍삼 연당 젤리 두 개씩 나눠 먹고 힘을 내었다.

 

  * 동쪽으로 트이자 나타난 어승생악

 

▲ 가파른 북쪽 능선으로 바로 올라

 

 아무래도 내를 건너야 할 것 같아 건너기 좋은 곳을 골라 비스듬히 건너 곧바로 나아가니, 벌써 오름 3부 능선 정도 되는 곳에 이르러 있었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 쓴 노가리(주목)가 더욱 많아지고 일부 나무에서 상고대가 녹아 후두둑 떨어진다. 조릿대가 무성하게 자라 나무가 없는 곳에서는 그것을 모여 쥐고 오른다. 식생은 꽝꽝나무, 진달래, 크고 작은 소나무가 주종이고 북동사면은 삼나무가 일부 조림되어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붉은오름은 한자로 쓸 때는 그대로 직역하여 적악(赤嶽)으로 표기하며, 애월읍 광령리 산 18-2번지에 자리한 표고 1,061m, 비고 136m, 둘레 2,473m인 서쪽으로 트인 말굽형 오름이다. 제주시에서는 남서로 16km, 애월에서는 남동으로 16km 지점인데, 어승생오름과 노로오름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고 보면 좋다. 해발고도 거의 1,000m의 용암대지에 형성된 분석구(噴石丘)로 플라이스토세 말기부터 유사시대에 걸친 시기에 폭발성 분화활동으로 생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5부 능선을 거치면서 더욱 가파르고 노가리가 많다. 태풍에 넘어진 나무가 대여섯 그루 몰려 있다. 대부분 때죽나무나 서어나무들이다. 먼저 오른 회원들이 함성소리에 바로 정상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능선에 올라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외쳤다. 북서쪽 비스듬한 곳으로 올랐으면 조금 쉬웠을 텐데, 바로 북으로 올랐으니 비고가 제일 높은 곳을 바로 치고 오른 셈이다. 시간을 물어보니 10분 정도씩 3번 쉬고 2시간  정도 걸렸단다. 

 

  * 눈 앞에 웅장하게 다가오는 한라산

 

▲ 주위에 멋진 오름이 많아

 

 말굽형 분화구를 가졌기에 시계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 얼마 안 가 의젓하게 앉은 어승생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사진을 찍고 정상으로 향하였다. 정상은 능선 남쪽에 있어 갈 수 있는 곳까지 다녀온다고 나아가는데, 이번에는 주위가 약간 뿌옇지만 한라산 정상이 옅은 구름을 막 뒤집어쓰려 하는 멋진 광경을 연출한다. 그 아래로는 이스렁과 볼레오름이 뚜렷하다. 구름이 경계를 구분해 주어 방애오름도 잘 보인다. 

 

 더 진행해 앞으로 나가자 이번엔 남쪽에 무거운 철탑을 머리에 인 삼형제 큰오름과 바로 앞에 납작 엎드린 살핀오름이 눈에 띈다. 소나무가 시야를 가려 조금 더 서쪽으로 가보니 남쪽 넓은 벌판 너머로 삼형제 샛오름과 말젯오름이 우뚝 서 있다. 지난 주 돌오름에서는 삼형제의 높이나 몸집이 비슷해 보였으나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맏형이 형이 틀림없어 보인다. 조금 더 서쪽으로 가서 노로오름까지 사진을 찍고는 다시 돌아온다.

 

 한라산과 어승생악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일행은 벌써 먹을 것을 펼쳐놓고 정상주(頂上酒)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탁월한 선택이었다니 금년에는 그런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마지막 날까지 회원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덩달아 입이 벌어진다. 새로 담은 김치와 갓 삶아 싸고 온 돼지고기, 1년 내내 회원들을 위해 먹을 것과 담근 술을 공급해준 양 선생에게 표창이라도 주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을 들으며 맛있게 먹었다.

 

  * 왼쪽 나지막한 살핀오름과 안테나 서있는 삼형제큰오름

 

▲ 김통정 장군 최후의 격전지

 

 나는 '애기 업개 말도 들으라'는 제주도 속담을 낳은 항파두리성 함락의 순간부터 이곳까지 밀려와 마지막 항전(抗戰)을 벌이고 자결했다는 김통정 장군의 슬픈 전설을 들려주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이 때 흘린 피가 오름을 물들여서 붉은오름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로부터 흙이 붉은 데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그럴 듯한 내용을 적고 있으나 그것은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오름 이름에 대해서 사실인 것처럼 아는 체 하는 것을 보면, 허허 웃고 만다. 가령 붉은 오름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원래 붉은 빛을 띠지 않은 오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화산쇄설물이라는 것은 원래 붉은 빛이지 않은가? 그것이 수천 수만 년 내려오는 사이에 이끼가 끼고 산화작용과 부식작용으로 성질이 변해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면서 박테리아가 들어가고 나뭇잎이 썩어 거름이 되면서 차차 검은 색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 중에는 오래도록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거나 목장으로 사용하면서 해마다 방화(放火)를 놓아 벌겋게 보이는 오름이 있는가 하면, 민짝하게 보이는 민둥산도 있고, 불이 들지 않고 나무가 우거진 멀리서 검게 보이는 산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또 만주어나 몽고어에서 어원을 가져다 '검'을 '신령스럽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천착(穿鑿)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 소나무 틈으로 보이는 삼형제 샛오름과 말젯오름

 

▲  오다가 천아오름도 들르고

 

 기분이 너무 좋아진 일행 중 비교적 젊은 축들은 너무 기분 좋은 나머지 살핀오름에 다녀오자고 했으나 시간이 너무 지체될 것을 염려하여 다음 해에 갈 곳도 남겨두어야 할 것 아니냐는 말로 넘기고 바로 내려오기로 했다. 짐을 챙겨 지고 남쪽 능선을 돌아 서쪽으로 내려왔다. 새로 빨간 비닐 끈을 매달아 길을 표시해 두었으나 그것은 한 바퀴 돌기 위한 것이어서 무시하고 바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치면서 북쪽으로 내려온다.

 

 얼마 안 내려 내(川)가 나타나고 과거 표고밭을 다니던 길이 황폐한 채로 흐르는 물에 의해 마구 패여 있었다. 이쪽에는 삼나무가 없는 곳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내려오면서도 확인했지만 오가는 길에 경치 좋은 냇가가 많다. 그러나 길이 패여 있어 오히려 길이 아닌 곳으로 걷는 것이 편했다. 오름 동서 양 산록에서 발원한 도근천(都近川) 상류가 북으로 흐르면서 협곡을 이룬 것이다. 우리가 보았던 넓은 벌판은 늪지로 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비가 많았을 때는 물이 이곳으로 흘러 이렇게 파버린 것이다. 

 

 얼마 안 가 노로오름 쪽으로 난 표고밭길이 나타난다. 그곳을 잘 익혀두기 위해 지도를 펴놓고 나침반을 대면서 확인했다. 삼나무가 끝나는 곳엔 키 큰 소나무 숲이고 소나무 줄기엔 송악이 올라 있다. 무엇을 하러 왔던 차량인지 험한 길을 오간 바퀴 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처음에 우리가 만났던 큰길로 나와 아침에 간 길을 거꾸로 걸어 천아오름을 등반하고 하산했다.

 

 * 서쪽에 웅장하게 자리한 노로오름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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