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라문화보존회 앙코르와트 답사기
*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앙코르와트 전경
▲ 들어가면서
지난 2006년 2월 16일부터 2월 20일까지 몇 십 년 동안 그리고 그리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다녀왔다. 얼마나 복에 겨운 달인지 4일부터 8일까지는 갑자기 금강산 갈 기회가 주어지 훌쩍 다녀온 뒤이기도 하다. 제주라는 특별한 위치에 살기 때문에 07시 20분에 제주공항을 출발해서 인천공항에 내려 10시 20분에 다시 베트남을 향해 떠났다. 2006년이 가기 전에 다녀온 이야기를 정리하려 했는데 맡은 일을 끝내고 보니, 해가 지나버렸다.
앙코르와트에 가려면 전에는 현지 공항사정이 나빠 태국에서 육로로 씨엠립까지 6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관광버스로 이동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씨엠립에 공항이 들어서면서 베트남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연공원으로 등록된 하롱베이와 한데 묶는 투어 상품이 개발되어 인천공항에서 하노이로 날아가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보고 나서 비행기를 타고 씨엠립으로 연결되는 코스가 보통이다.
* 해자 쪽을 향하고 있는 꼬리가 잘린 사자상
하지만 우리 탐문회 답사반은 항공 티켓을 얻을 수 없어 그 코스가 아닌 베트남 항공을 이용해 인천에서 호치민시(사이공)의 탄손너트 공항으로 날아가 씨엠립과 다시 항공으로 연결해 두 곳을 묶는 관광을 하게 되었다. 시간표 상으로 보면 10시 2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2시에 탄손너트 공항에 도착하니까 3시간 40분 걸리는 것처럼 단순 계산이 나오지만, 사실은 베트남이 우리보다 시차(時差)가 2시간 늦기 때문에 5시간 40분 걸리는 것이다.
베트남은 나와 인연이 깊어 군대시절에 파견돼서 1972년 한 해를 보낸 곳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 관광이 시작되자 1994년 2월, 22년 만에 가보았고, 이번에 다시 12년 만에 호치민시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처음 갈 때는 부산항에서 미군 함정으로 6박7일 걸려 갔던 곳을 5시간 40분에 가는 거라 시간은 많이 단축된 셈이다. 내리자마자 캄보디아로 가기 위해 출국 수속을 마치고 현지 시간 4시 30분에 출발, 5시 30분에 씨엠립에 도착하여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왔으니, 하루종일 비행기를 3차례나 타고 내리며 삼국(三國)에서 정신 없이 보낸 셈이다.
* 석양에 비치인 캄보디아 거리를 지나가다 본 풍경
▲ 캄보디아 그리고 크메르루즈
캄보디아(Cambodia)는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남서부에 있는 나라로,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일본에 점령되었고 일본 패전 후 1947년 5월 프랑스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53년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정식 명칭은 캄보디아왕국(The Kingdom of Cambodia)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남동부 캄보디아 평원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로, 북동쪽으로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으로 베트남, 북쪽과 서쪽으로 타이에 접하며, 남서쪽으로 시암만(灣:타이만)에 면한다. 국명은 프랑스어(語)인 'Cambodge'를 영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 고대의 캄부자(Kambuja; 앙코르) 왕국에서 유래했다. 1975년에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에 잔인하고 무자비한 반대파 학살이 이루어져 1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행정구역은 20개주(khaitt), 4개 크롱(krong)으로 되어 있다.
* 난간 테라스로 만든 일곱 머리가 양면으로 조각된 나가
크메르루즈(Khmer Rouge)는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로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되었는데,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右翼)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이 정권의 4년 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과 살상(殺傷)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에 알려졌다. 1979년 베트남 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즈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 정부가 들어섰다.
* 앙코르와트 한쪽 구석을 차지한 가게들
크메르루즈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 아래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 후 유엔의 중재로 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즈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 결과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즈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左傾)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여러 가지 유적이나 예술품을 보면 머리가 없는 불상이나 동상이 대부분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들이 집권 당시에 미신이라고 다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 호텔 앞 화단에 세워놓은 수문장 형태의 석상
▲ 못 사는 나라의 병폐와 씨엠립
이런저런 수속을 하는 사이에도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모습이었다. 없어서 죽네 사네 하지만 있는 사람들의 본을 보면서 한데 얼려 이렇게 고급 문화 생활을 누리는 것이리라. 사투리가 다른 팀들이 각자의 줄에 서서 자기네들의 방언으로 떠들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우습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건설해 돈을 벌어먹는 씨엠립 공항에서도 입국 수속은 캄보디아인의 임무이자 권리기에 그 절차를 밟는 팀들에게 고속 통행료를 받아 챙기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덩달아 왕년의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소형인데 기다리면 얼마나 기다릴 것인가 하면서 우리 일행은 그런 관행을 없애기 위해 뻐기고 버텨 제일 늦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후끈한 열기가 풍기는 곳에서 중형 버스가 우리를 맞는다. 예상외로 버스 안에는 깜빡깜빡하는 술집 같은 전등 장식이 촌스럽게 돌아간다. 일행은 낯선 이국의 거리풍경에 눈길을 주며 식당으로 가 한식으로 저녁다운 저녁을 먹었다. 아침에 일찍 나오려고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낮에 기내식을 먹은 후라 출출했던지 쌈을 잘도 싸먹는다.
* 앙코르와트의 유적의 모양을 딴 호텔을 수호하는 사자상과 제단
씨엠립(Siem Reap)은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유적지인 앙코르와트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 조그만 도시이다. 역사적이고 소중한 유적지를 끼고 있는 캄보디아 서북쪽의 작은 마을 씨엠립은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외래 방문객의 유입으로 차츰 도시로 발전하여 지금은 공항까지 갖게 되었으며, 고급 호텔로부터 저렴한 배낭여행자들의 숙소 그리고 식당 등 각종 편의시설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고 있다.
옛 시장을 중심으로 타운을 이루어 중앙에 자리잡았고, 옛 시장은 주민들을 위한 작은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여행자들을 위한 각종 기념품점과 식당, 마사지 샵 등의 시설물들이 들어서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프놈펜의 킬링필드와는 다른 주변의 희생자 유골을 보관하고 있는 왓 트마이(킬링필드), 전쟁박물관과 씨엠립 민속촌, 그리고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똔레샵 호수를 볼 수 있다.
*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다리 옆에 세운 사자상과 테라스
▲ 앙코르와트로 가면서
'모나리치'라는 1급 호텔에서 하루를 묵은 일행은 아침을 먹고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주변 풍경은 월남이나 태국의 주변 도시 비슷한 분위기이나 공터에 이런 저런 비닐 조각들이 너무 지저분하게 깔려 있다. 현지 안내인이 열심히 앙코르와트에 대해 설명을 하길래 열심히 들어 본다. 앙코르와트(Angkor Wat)는 앙코르 문화의 대표 유적으로 앙코르톰의 남쪽 약 1.5km에 있으며, 12세기중반 경에 건립되었다. '앙코르'는 왕도(王都)를 뜻하고 '와트'는 사원(寺院)을 뜻하지만, 반영구적 사원은 아니다.
당시 크메르족은 왕과 유명한 왕족이 죽으면 그가 믿던 신(神)과 합일(合一)한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왕은 자기와 합일하게 될 신의 사원을 건립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유적은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룬 수리아바르만 2세가 바라문교(婆羅門敎) 주신(主神)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원이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 불교도가 바라문교의 신상(神像)을 파괴하고 불상을 모시게 됨에 따라 불교사원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건물, 장식, 부조(浮彫) 등 모든 면에서 바라문교 사원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 호텔 앞에 세워놓은 바이온 첨탑 모습의 분수대
바깥벽은 동서 1,500m 남북 1,300m의 직사각형으로 웅장한 규모이며, 정면은 서쪽을 향한다.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너비 190m의 해자(垓字)를 건너면 3기의 탑(塔)과 함께 길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 돌을 깔아놓은 참배로를 따라 475m쯤 가면 중앙사원에 다다른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사당탑(中央祠堂塔)과 탑의 동서남북에 십자형으로 뻗은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네 모서리에 우뚝 솟은 거대한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은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187m)이 4m, 제2회랑(115×100m)이 12m, 제3회랑(60×60m)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를 뜻하는 수미산(須彌山)은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쌓아놓았으며, 높이 59 m의 중앙사당탑의 탑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사각탑 끝은 선으로 연결해보면 사각추(四角錐)의 피라미드 모양이 된다고 했다.
* 앙코르와트로 들어 가는 문에서 본 사원
▲ 앙코르와트 사원과 자야바르만 2세
멀리 사진으로만 보던 유적이 보이는 곳에서 차를 내리려는데 입구에 있던 한 사람이 차에 올라와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는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부정이 너무 심해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의 숫자를 속이지 못하게 기관에서 나와 확인을 하는 것이라 했다. 옛날에는 성으로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둘레를 파고 물이 흐르도록 했는데 이를 해자(垓字)라 한다. 앙코르와트로 들어가는 해자 위에 놓인 다리 석상 앞에서 또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다. 내용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원의 뛰어난 미술적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건물의 형태나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왕조의 독자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장(全長) 760m에 이르는 제1회랑벽(回廊壁)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泉水),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柱廊)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舞姬) 아프사라스, 여러 개의 머리를 마치 부채처럼 치켜든 커다란 뱀, 창문과 기둥의 장식조각 등이 돋보인다. 앙코르왕조는 13세기 말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함에 따라 앙코르와트도 정글 속에 묻혀버렸다.
* 앙코르와트의 유적의 모양을 딴 호텔을 수호하는 사자상
1861년 표본 채집을 위해 정글에 들른 프랑스 박물학자가 이곳을 발견, 그때부터 다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지역은 1972년부터 외부인에게 폐쇄된 이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하면서 전화(戰禍)와 약탈로 훼손되어 수많은 불상이 조각난 채 나뒹굴고 대부분이 외국으로 유출되어, 완전한 복구는 어려운 상태이다. 82년 집계에 의하면 앙코르와트의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없어졌고, 전체 유적의 70%가 복원불능의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 왕궁의 유물 약 1,000점이 도난, 파괴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이 유적지의 복원을 위해 조사단의 파견을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한 바 있다.
자야바르만 2세는 캄보디아 앙코르왕국 최초의 왕으로 자바의 사일렌드라 왕조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재위 중 혼란한 국내의 재통일에 힘썼으며, 신왕 숭배 사상을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앙코르 지방에 도읍하여 이후 6세기 남짓한 앙코르왕조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캄보디아 분열기 수진랍(水眞臘)의 왕가 출신으로, 자바에서 귀국하여 국내를 통일하고, 자바의 사일렌드라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재위 중 혼란된 국내의 재통일에 힘썼으며, 신왕숭배(神王崇拜) 사상을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통레사프호(湖)의 북서안에 위치한 앙코르 지방에 도읍하여 이후 6세기 남짓한 앙코르왕조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 옆에서 바라본 앙코르와트의 모습
♬ Take me home - Phil Cou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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