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 1. 1. 월요일 맑음
어제 산방산과 금오름에서 몸을 날려버릴 듯 차고 사납게 불던 바람과 검은 구름으로 마감한 저녁 날씨 때문에 행여 새해 첫날 일출(日出)이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밤새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을 맞아 5시에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있기는 한데, 구름이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하늘이 보여, 좋은 조짐이려니 하고 스스로 위안하며 머리를 깨끗이 감았다. 정말 지난 3년간의 일출은 우리 경제의 먹구름을 예고(豫告)하기나 하듯이 매우 컴컴했다. IMF 위기가 닥쳐오던 1998년은 '높은오름'에 올라가서 비를 맞으며 동쪽 하늘을 응시했는데, 도무지 붉은 색도 한 점 내비치지 않아 하늘을 원망하다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다음해 1999년은 '두산봉'에 가서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을 향해 "이제 해는 찬란하게 떠올라 저 구름 뒤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저마다 자기가 갖고 싶은 만큼의 커다란 태양을 마음으로 그려 가슴속에 하나씩 품고 갑시다." 하고 위로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떠들썩했던 작년 2000년 새 천년의 태양은 '대왕산'에 가서 맞았는데, 바다에서 떠오르는 건 못 보고 한참 뒤에야 구름 위로 솟는 해를 볼 수 있어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래도 작년 2월28일 육지로 답사 나가서, 정동진(正東津)에서 구름 한 점 없는 명쾌한 일출을 보고 괜스레 기분이 좋았던 일을 떠올리며, 곤하게 자는 막내아들을 깨워 길을 재촉했다. 6시가 되어, 일행 33명은 저마다 승용차를 나눠 타고 일주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북동쪽 바다 위로 검은 구름이 진하게 끼어 있으나 해가 떠오를 남동쪽하늘은 아주 시원스럽지는 못하지만 환히 트이어 있어 기대를 해도 좋겠다고 동승한 분들을 다독였다.
정말 시원한 해돋이가 되어 우리 경제도 그처럼 환히 살아나길 기대하는 심정으로 오름에 오른다. 오늘 제주도에는 여러 곳에서 일출 행사를 갖고 있다. 성산 일출봉의 일출제를 비롯해서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과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에서 마을 사람들끼리 여는 해돋이 행사, 그리고 송악산에서 치러지는 일출 행사를 합치면 4곳에서 공식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 뜻 있는 사람들은 복잡한 곳을 피해 저마다 조용한 오름에 올라 1년을 설계하며 새해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북제주군 구좌읍 한동리 지경에 위치한 해발 282.2m의 둔지오름에 오르니, 벌써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멀리 어둠을 헤치고 일출봉이 보이고, 왼쪽으로 지미봉과 그 건너 우도(牛島)의 쇠머리오름, 일출봉 앞에 재작년에 갔던 두산봉, 오른쪽으로 영주산 그 앞에 용눈이오름, 그 앞 가까운 쪽으로 4·3의 아픔을 품은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다랑쉬오름 꼭대기에는 벌써 해돋이를 보러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신문(新聞)의 예고에는 7시 35분 경에 해가 떠오른다고 되어 있지만 아직은 검은 구름 위로 붉은 기운만 있지 해는 나타나지 않는다. 삼각대에 사진기를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카메라 클럽 회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긴장되어 있다. 나는 그 긴장을 풀어주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향해 '해 뜨는 순간 자기의 소원을 간절하게 빌면 꼭 이루어진다'는 말을 건넸다.
생각 같아선 박두진 선생의 '해'라도 낭송해 주고 싶지만 그들의 명상을 해칠까봐 마음속으로만 뇌까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7시 36분 30초. 드디어 새빨갛게 타오르는 태양이 검은 구름이 터진 틈으로 진한 빛을 내뿜는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솟는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아쉬움만 남기고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제는 저 먹구름 위로 솟아날 때를 기다려야 되겠구나 하고 기대를 그쪽으로 걸고 있는데, 43분 경 다시 한 번 구름 사이로 선홍빛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탄성이 터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46분. 수평선으로부터는 아니지만 시커먼 검은 구름 속에서 눈부시게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모두들 두 손을 모아 쥐고 경건히 소원을 비는 모습이 보인다. 일순 고요하다 못해 차라리 정적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나도 두 손을 모아 마음속의 소원들을 빌어본다.
"먼저 주름진 우리 경제를 활짝 펴게 해주시고, 남북 관계도 원만하게 진전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한라산에 케이불카 설치하겠다고 나서서 열을 올리고 있는 분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 없었던 일로 되돌려 아름다운 우리 제주도의 자연이 오래오래 보전(保全)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개인적인 소원입니다. 연로하신 우리 어머님 건강을 잃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가족이 탈없이 1년을 지낼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마지막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내 마음속 친구 한 사람의 건강을 잘 보듬어 주셔서 오래도록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해는 정말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찔하게 온전한 모습을 보일 때까지 3분 동안 이글거렸다. 의유당의 동명일기에는 '뛰놀기 더욱 자로(자주)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정말 뛰논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었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눈을 뗀 뒤에도 몇 분 동안 그 잔영(殘影)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정말 금년 첫날 떠오른 저 태양처럼 우리 경제가 뒤늦게나마 활성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아 뜨거운 물과 차를 나눠 마시며 우리 올해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살자며 주위를 돌아보니, 풀밭에서는 유난히 인동(忍冬) 덩굴이 많이 눈에 띈다. 그래 저렇게 가냘픈 잎으로 추위를 견디며 파랗게 겨울을 나는 인동 덩굴처럼 우리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어 초여름에는 찬란한 꽃을 피우길 기대해 본다.
¤이 축복의 일출(日出)을 여러분의 가정에 보내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애독바랍니다.

어제 산방산과 금오름에서 몸을 날려버릴 듯 차고 사납게 불던 바람과 검은 구름으로 마감한 저녁 날씨 때문에 행여 새해 첫날 일출(日出)이 무산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밤새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을 맞아 5시에 일어났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끼어 있기는 한데, 구름이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하늘이 보여, 좋은 조짐이려니 하고 스스로 위안하며 머리를 깨끗이 감았다. 정말 지난 3년간의 일출은 우리 경제의 먹구름을 예고(豫告)하기나 하듯이 매우 컴컴했다. IMF 위기가 닥쳐오던 1998년은 '높은오름'에 올라가서 비를 맞으며 동쪽 하늘을 응시했는데, 도무지 붉은 색도 한 점 내비치지 않아 하늘을 원망하다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다음해 1999년은 '두산봉'에 가서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을 향해 "이제 해는 찬란하게 떠올라 저 구름 뒤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저마다 자기가 갖고 싶은 만큼의 커다란 태양을 마음으로 그려 가슴속에 하나씩 품고 갑시다." 하고 위로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떠들썩했던 작년 2000년 새 천년의 태양은 '대왕산'에 가서 맞았는데, 바다에서 떠오르는 건 못 보고 한참 뒤에야 구름 위로 솟는 해를 볼 수 있어 그것으로나마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래도 작년 2월28일 육지로 답사 나가서, 정동진(正東津)에서 구름 한 점 없는 명쾌한 일출을 보고 괜스레 기분이 좋았던 일을 떠올리며, 곤하게 자는 막내아들을 깨워 길을 재촉했다. 6시가 되어, 일행 33명은 저마다 승용차를 나눠 타고 일주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북동쪽 바다 위로 검은 구름이 진하게 끼어 있으나 해가 떠오를 남동쪽하늘은 아주 시원스럽지는 못하지만 환히 트이어 있어 기대를 해도 좋겠다고 동승한 분들을 다독였다.
정말 시원한 해돋이가 되어 우리 경제도 그처럼 환히 살아나길 기대하는 심정으로 오름에 오른다. 오늘 제주도에는 여러 곳에서 일출 행사를 갖고 있다. 성산 일출봉의 일출제를 비롯해서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과 조천읍 함덕리 서우봉에서 마을 사람들끼리 여는 해돋이 행사, 그리고 송악산에서 치러지는 일출 행사를 합치면 4곳에서 공식적으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 뜻 있는 사람들은 복잡한 곳을 피해 저마다 조용한 오름에 올라 1년을 설계하며 새해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북제주군 구좌읍 한동리 지경에 위치한 해발 282.2m의 둔지오름에 오르니, 벌써 동쪽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멀리 어둠을 헤치고 일출봉이 보이고, 왼쪽으로 지미봉과 그 건너 우도(牛島)의 쇠머리오름, 일출봉 앞에 재작년에 갔던 두산봉, 오른쪽으로 영주산 그 앞에 용눈이오름, 그 앞 가까운 쪽으로 4·3의 아픔을 품은 다랑쉬오름이 보인다. 다랑쉬오름 꼭대기에는 벌써 해돋이를 보러간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신문(新聞)의 예고에는 7시 35분 경에 해가 떠오른다고 되어 있지만 아직은 검은 구름 위로 붉은 기운만 있지 해는 나타나지 않는다. 삼각대에 사진기를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는 카메라 클럽 회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긴장되어 있다. 나는 그 긴장을 풀어주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향해 '해 뜨는 순간 자기의 소원을 간절하게 빌면 꼭 이루어진다'는 말을 건넸다.
생각 같아선 박두진 선생의 '해'라도 낭송해 주고 싶지만 그들의 명상을 해칠까봐 마음속으로만 뇌까렸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7시 36분 30초. 드디어 새빨갛게 타오르는 태양이 검은 구름이 터진 틈으로 진한 빛을 내뿜는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솟는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아쉬움만 남기고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제는 저 먹구름 위로 솟아날 때를 기다려야 되겠구나 하고 기대를 그쪽으로 걸고 있는데, 43분 경 다시 한 번 구름 사이로 선홍빛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탄성이 터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46분. 수평선으로부터는 아니지만 시커먼 검은 구름 속에서 눈부시게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모두들 두 손을 모아 쥐고 경건히 소원을 비는 모습이 보인다. 일순 고요하다 못해 차라리 정적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나도 두 손을 모아 마음속의 소원들을 빌어본다.
"먼저 주름진 우리 경제를 활짝 펴게 해주시고, 남북 관계도 원만하게 진전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한라산에 케이불카 설치하겠다고 나서서 열을 올리고 있는 분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 없었던 일로 되돌려 아름다운 우리 제주도의 자연이 오래오래 보전(保全)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개인적인 소원입니다. 연로하신 우리 어머님 건강을 잃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가족이 탈없이 1년을 지낼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마지막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내 마음속 친구 한 사람의 건강을 잘 보듬어 주셔서 오래도록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해는 정말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찔하게 온전한 모습을 보일 때까지 3분 동안 이글거렸다. 의유당의 동명일기에는 '뛰놀기 더욱 자로(자주)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정말 뛰논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이었다.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눈을 뗀 뒤에도 몇 분 동안 그 잔영(殘影)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정말 금년 첫날 떠오른 저 태양처럼 우리 경제가 뒤늦게나마 활성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아 뜨거운 물과 차를 나눠 마시며 우리 올해는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살자며 주위를 돌아보니, 풀밭에서는 유난히 인동(忍冬) 덩굴이 많이 눈에 띈다. 그래 저렇게 가냘픈 잎으로 추위를 견디며 파랗게 겨울을 나는 인동 덩굴처럼 우리도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어 초여름에는 찬란한 꽃을 피우길 기대해 본다.
¤이 축복의 일출(日出)을 여러분의 가정에 보내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애독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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