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신을 향한 인간들의 자취⑨

김창집 2007. 1. 16. 20:50

 

-- 탐라문화보존회 앙코르와트 답사기

 

 

                                      * 거대한 문어처럼 타 프롬의 유적을 덮친 나무

 

▲ 앙코르를 알린 사람들

 

 모두들 앙리무오가 앙코르를 발견한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나 이미 16세기 말부터 포르투칼의 탐험가들이 이곳을 다녀갔고, 관심을 갖고 처음 이곳을 서양에 알린 사람은 프랑스의 신부 샤를 에밀 부유보였다. 선교사였던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기독교를 전파시키고자 노력했는데, 그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1850년 12월이었다. 관광객처럼 이틀간 이곳을 보고 간 다음 1958년에 방문기를 발표했다.   

 

 앙리 무오(1826∼1861)는 부유보의 방문기를 읽고 이곳에 오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었다. 프랑스의 몽벨리아르에서 재무성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미 18세에 러시아 사관학교 교수가 되어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다 크림전쟁이 확산되자 귀국했다. 그리고 동생 샤를과 함께 유럽 전역을 여행했고, 동식물 공부를 한 후 사재를 털어 1858년 4월에 영국에서 출발하여 태국으로 와서 방콕을 베이스 캠프로 삼고 4차에 걸친 탐사에 들어갔다.

 

 그는 1958년 12월부터 1860년 4월까지 있었던 2차 탐사 때 이곳 앙코르와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861년 10월 떠난 마지막 탐사지인 라오스 정글에서 열병에 걸렸는데, 누적된 과로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2일의 투병 끝에 11월 10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보고서는 그가 죽은 뒤인 1863년에 파리와 런던에서 동시에 발표되었고, 1864년에는 영문 단행본이 출간되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인으로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나와 사진 기술을 익힌 뒤 1866년 사상 최초로 사진을 찍어 서구에 소개한 존 톰슨의 공로도 크다. 그 다음은 1898년 하노이에 설립된 프랑스 극동학원(EFEO)에 소속되었던 앙코르유적보전회 회장을 20년 동안 맡아 붕괴 방지 작업과 복원 작업에 헌신한 펠리오와 같은 학자의 숨은 노력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앙코르 시대의 일을 기록으로 남겨 그 수수께끼를 풀어준 원나라 사신 주달관의 '진랍풍토기'도 중요한 기록이다.       
   

 

 

                          * 길고 긴 숲길을 걸어가(위) 다 무너져 가는 문으로 들어간다.

 

▲ 효심으로 지어바친 타 프롬 사원

 

 타프롬 사원은 1186년 앙코르제국의 세종대왕과 같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님을 기리기 위해 브라흐마 신에게 헌납한 사당 겸 사원이다. 수많은 건축물을 남겼지만 여러 신과 왕을 위해 지은 것이었고, 그 다음으로 어머니를 위해 사당을 지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위한 사원인 프레아칸을 지었는데, 프레아칸은 바로 이 타프롬과 거의 같은 구조이다. 

 

 타프롬은 불교 시절 건립된 사원이지만 원래의 크메르 왕국은 힌두교를 신봉했으며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도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뚜렷하게 불교 양식이 도입되기 전이었다. 따라서 사원의 구조나 양식은 힌두교 건축양식이다. 타프롬 사원을 둘러싼 외벽 둘레만 1㎞×700m나 되며 외벽은 반띠이아 끄데이와 근접할 정도로 크지만 대부분 나무 둥지에 허물어지고 사원 내부도 워낙 깊은 밀림 속이라 발굴 팀조차도 아직 신전의 정확한 크기와 규모를 측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곳에 새겨진 문자 기록의 내용을 보면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고위급 승려가 18명, 관리인이 2,740명, 보조원이 2,202명, 그리고 무희들이 무려 615명이나 소속되어 있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다. 또 황금으로 만든 접시 세트의 무게는 총 500kg이나 되었고, 35개의 다이어먼드,  40,620개의 진주, 4,540여 개의 각종 보석과 876개의 중국산 휘장과 512개의 실크 침구, 523개의 양산이 있었다고 자산 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의 이름은 '라자비하라'였으며, 당시에는 순수하게 왕실의 수도원 구실을 했었다. 지금 이곳은 영화 '툼 레이더'를 촬영하여 세계에 소개됨으로써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곳이 되었다. 첫 장면에 안젤리나 졸리가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곳이 바로 야소다라뿌라의 중심 사원인 프놈 바켕이었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재스민 꽃이 피어 있는 '춤추는 빛의 무덤'의 입구를 찾아가는데, 그곳이 바로 이 타프롬이다.

 

 

 

                                    * 다 무너져 가는 건물 유적을 안고 쓰리질 것 같은 나무

 

▲ 인간과 자연의 투쟁의 현장

 

 우리가 앙코르 톰의 동쪽 문을 지나 앙코르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바로 타프롬이었다. 우선 화장실에 다녀오라는 안내인의 분부대로 어둑한 화장실에 들러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가볍게 하고 장시간 답사하면서 유적 안에 실례하지 않도록 하였다. 사실이지 내가 이곳에 오면서 가장 보고 싶고 기다리던 곳이 바로 타프롬이었다. 이곳을 다녀간 분들이 찍은 사진 중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이 있던 곳….

 

 우주 괴물 같은 것이 오래된 유적을 휘감고 있는 사진을 보며, 왜 유적을 보호하지 않고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훼손되도록 놓아두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알고 보니 타프롬은 프랑스 극동학원(EFEO)에서 앙코르 유적들을 복원하면서 사원(寺院) 하나만은 19세기 발견 당시 모습으로 그대로 남겨둔다는 원칙을 세웠다 한다. 그들이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놀라움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배려에서였으리라.

 

 도올 선생은 '토인비가 말한 자연의 회귀(Return of Nature)의 실상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인간의 자연과의 투쟁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었나를 실감케 해준다. 그러나 인간의 승리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매우 냉혹하다.'고 썼다. 이곳은 찬란한 문명의 소산을 거대한 자연이 허무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더 극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멸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농부들은 전 생애를 바쳐 자연의 일부인 잡초 제거와 병충 구제를 하다 결국 자연의 일부인 병균의 침투로 가고 마는 것이며, 세균의 침투로 결국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여 기나긴 숲을 걸어 들어가며 자연에 더욱더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탑을 삼키려는 나무(위)와 삼켜버린 나무

 

▲ 이제 다시 사람의 발길이

 

 오가는 많은 관람객의 90%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곧이 들을 정도였다. 팔도 사투리가 난무하고 차림새로 보아 눈으로 훑고 그냥 지나칠 할머니들이나 아이들도 많다. 모래를 깔아 놓은 숲길을 가는 도중에 뿌리 조금 위가 파인 커다란 나무 옆에 멈춰 서서 가이드가 그에 대한 설명을 한다. 이 커다란 속성수는 이앵나무인데 고무 수액을 뽑아내듯이 수액을 뽑아내어 가정에서 호롱불 기름 등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어느덧 유적 입구에 도착했는데, 서문 입구인 듯 다 허물어져 고푸라 아래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는데, 바로 눈앞에 울타리를 타고 넘는 듯한 나무 뿌리가 걸려 있다. 문을 돌아 들어가 보니 그곳에 뿌리가 더 많이 걸려 있고, 어떤 나무는 건물을 하나 삼켰다 설사가 난 듯  배속이 비었는데, 다시 새살이 돋고 아래에는 무너져 굽만 남은 건물 흔적이 있다. 그리고 많은 관광객이 오가게 되어 잡목을 제거했는지 깨끗했고 유적을 덮친 커다란 나무만 남겨 놓은 것이다.

 

 아무튼 위험한 곳은 빼고 일정한 부분만 관람하도록 해놓았다. 어떤 것은 그 뿌리가 천장에서 물이 새면서 여러 개의 고드름이 되어 뻗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예 폭포수 같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울타리가 무너진 곳으로 구멍이 터진 곳으로 돌아다니다 문득 눈이 머문 곳에는 커다란 우주 괴물 같은 문어가 낼름 탑 하나를 덮친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있었고 커다란 뱀이 칭칭 감고 조이는 것 같은 것도 있다.         

 

 압사라 하나를 찍고 나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와 보니,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문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이 그 느낌을 말하고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 된 것이다. 나무와 유적의 싸움은 일단 휴전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재진행형이다. 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많은 유적을 다 복원할 동안 그냥 두어 자연의 위대함을 알리면서 옛날의 모습을 보일 것인가, 아니면 괴로운 문화유적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빼어내어 편안한 모습으로 복원할 것인가?

 

 

 

                 * 구렁이처럼 유적을 감고 있는 나무 뿌리(위)와 숲속에서 만난 미녀 압살라(아래)

 

♬ Dream Polonaise - Los Chacos(인디오 앙상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