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산방산 --- 하늘로 오르는 신들의 계단

김창집 2001. 11. 14. 18:55

▲ 전설과 현실 사이

아득한 옛날, 한 사냥꾼이 있었다. 하루는 하루종일 아무 것도 잡지 못해 헤매다가 한라산 꼭대기까지 이르고 말았다. 마침 그곳에 흰 사슴 한 마리가 있어 황급히 활을 겨누었는데 그만 실수하여 활 끝으로 옥황상제의 궁둥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쑥 뽑아 던졌다. 그것이 날아와 앉은 것이 산방산(山房山)이고, 뽑힌 자리가 백록담(白鹿潭)이 되었다는 얘기다.

지질학자들이 도출해 낸 가설에 의하면, 적어도 150만년 전에는 제주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화산 활동이 잦은 일본 화산대의 영향을 받았는지, 한반도의 끝자락 망망대해(茫茫大海) 속에서 뭔가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되다가, 70∼80만년 전 그 동안 모아진 힘은 흙과 바위를 바다 위로 불끈 솟아 올렸다.

드디어 남해 상에 제주도가 탄생 된 것이다. 산방산과 서귀포 범섬, 섶섬이 솟아나고, 다시 몇 십만 년이 흐르는 동안 제주도 해안선의 윤곽이 형성된다. 그리고, 50∼30만년 사이에 제주도 중심부에서 화산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면서 한라산체가 만들어져 중산간 지대가 생겨나고, 한라산은 그 높이를 더해간다.

한 동안 주춤하던 화산은 다시 10만년에서 2만5천년에 이르는 동안에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때는 중산간 층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한라산 분화구로 용암이 다 솟아 나오지 못하고 땅거죽이 약한 곳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져 분출하게 된다. 이것이 기생화산이고 그 결과 솟아오른 물질이 쌓인 것이 오름(기생화산체)이다. 산방산은 종상화산(鐘狀火山)으로 화산이 속으로 터져 밖으로 솟아나지 못하고 안에서부터 부풀어오른 것이다.

바다 쪽으로 해발 150m 되는 곳에 커다란 굴이 있는데, 이 굴은 해식동굴(海蝕洞窟)이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화산이 속에서 터지면서 그 높이만큼 들어 올렸다는 얘기가 된다. 그 굴에는 절이 있고 바위 속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데, 이 물은 산방덕의 눈물이라고 한다. 고성목과 연계된 산방덕의 이 전설은 들을수록 슬프다.

'고성목은 안덕면 화순 마을에서 태어났다. 키가 크고 힘도 세었으나 본시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벼슬은 못하고 대신 열심히 일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래서, 그는 산방덕을 첩으로 삼게 된다. 천한 놈이 산방덕이라는 미인을 데리고 호화롭게 산다는 말을 들은 관가에서는 그를 혼내주기로 작정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으나 모두 실패로 그친다. 화가 난 목사는 그를 역적 누명을 씌우고 잡아다 모진 고문으로 죽게 한다. 산방덕은 본래 산방산의 여신이었다. 사실은 고성목을 도와 큰 일을 도모하려다 오히려 똑똑한 사람만 죽이고 만 셈이었다. 이에 산으로 올라간 산방덕이 슬픔에 겨워 흘리는 눈물이 지금도 산방굴로 떨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전설은 '증거를 제시하며, 실제로 있었다고 믿어지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이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사람들의 우주관으로는 이런 이야기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 천연 기념물이 자라는 식물의 보고(寶庫)

동쪽으로 정상에 오르는 길목은 풀밭인데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입구 바위에는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왕모람나무가 열매를 매달고 있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듬성듬성 이어진 사이로 사스레피나무가 많이 보인다. 초여름 이곳을 지나칠 때면 그 꽃향기가 너무 진해 코를 막아야 할 정도였다. 조금 더 들어서니 오름 숲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섬쥐똥나무, 청미래덩굴, 보리수나무, 상동나무, 상산나무, 예덕나무, 꾸지뽕나무 등이 우거지고 그 위로 사위질빵, 으아리, 남오미자, 으름, 쥐다래 덩굴이 엉켜있다.

무덤이 있는 곳에 이르러 사방을 보면 산세(山勢)가 예사롭지 않다. 앞에 커다란 바위가 막아서고, 왼쪽 정상에도 만만치 않은 바위들이 불쑥불쑥 솟았다. 상록수가 가파른 산을 덮었고, 오른쪽 가파른 능선에는 고궁(古宮) 지붕마루에 줄지어 세워 놓은 토우(土偶)들처럼 보인다. 집터였는지 대나무도 우거져 있다.

중턱을 넘어서면서 그 경사가 60도는 될 것 같은데도 상록수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어 하나도 힘든 줄 모른다. 구실잣밤나무를 주종으로 참식나무, 후박나무, 동백, 생달나무, 육박나무, 돈나무, 아왜나무, 까마귀쪽나무 등의 사이로 간혹 자귀나무 같은 낙엽수가 보인다. 한쪽을 보니 괴불나무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지구가 고장 난 게 아닐까. 인동과의 낙엽활엽관목인 이 나무는 원래 5∼6월에 꽃이 피는데, 이상난동으로 이 겨울에 앙증맞은 꽃을 저리도 처량하게 피워놓았다.

이 산은 해안가에 있고 또 경사가 심하며 바위가 많아서인지 희귀 식물이 많다. 본도 유일의 섬회양목 자생지이며, 천연기념물 제182-5호로 지정된 지네발란과 석곡, 풍란 등이 자생지라고 하나 내 눈에는 지금 하나도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콩짜개난과 비슷한 콩짜개덩굴만 무성하다. 몇 해 전에 도채꾼들에 의해 멸종되다시피 해서 난동우회에서 복원 사업을 벌였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 신선이 앉아 노는 자리, 선인탑(仙人塔)에서

해발 395m 정상에는 앉아서 쉴 수 있도록 긴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매우 쌀쌀했기 때문에 거기서 쉬는 사람은 없고 모두들 바다 쪽을 향해 열려 있는 바위인 선인탑으로 올랐다. 이 바위에 오르면 눈앞이 탁 트여 정말 신선이 된 기분을 느낀다. 사방은 거의 구실잣밤나무 숲이다. 아래쪽에는 바다를 향해 용머리가 지금 당장이라도 꿈틀거릴 듯 엎드려 있고, 그 건너에 형제섬이 정답게 앉아 있다.

멀리 문제의 송악산이 또아리를 틀고 가파도, 마라도가 점잖게 자리잡았다. 왼쪽에는 피난 온 어선단이 점점히 박혀 있다. 다시 더 고개를 돌리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화순해수욕장이 펼쳐지고 그 끝으로 주상절리가 있는 열리 낭떠러지가 위태롭게 서 있다. 나지막한 월라봉과 큰 몸집을 하고 있는 군산도 보인다. 한라산은 구름에 싸여 보이지 않으나 그런 대로 햇빛이 비치는 대낮이어서 조망(眺望)의 맛이 살아난다.

이 산은 바닷가에 위치한 높고 둥근 산이어서 구름 모자를 자주 쓴다. 작년 8월, 조선일보 잡지사 월간 <山>의 안중국 기자와 조인원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이 산에 올랐는데, 사방을 조망하려고 아침부터 구름이 벗어지기를 기다렸으나 1시가 지나도록 벗겨지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지나가던 구름 한 무더기가 이 산의 머리에 걸려 빙빙 도는 것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우선 구름을 밀어 올리면 그 구름은 빠른 속도로 한바퀴 돌아 다시 바다 쪽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바람에 다시 밀려 올라오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 때는 아무 것도 못 보고 기다리다 지쳐 2시가 되어서야 그냥 내려온 적이 있다. 그래서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하는 노래가 생겨난 것이리라.

선인탑에서 내려와 서쪽 바위 위로 건너가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고, 단산이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모자를 날릴 기세다.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살피는데 철쭉이 두어 그루 눈에 뜨이고 윤노리나무도 보인다. 천선과나무도 잎을 모두 떨구고 추운 듯이 가지를 움추렸다. 나무 아래에는 자금우와 마삭줄, 겨울딸기와 백량금, 남오미자 같은 식물들이 흩어져 있다.

산등성이를 타고 북쪽 줄기 끝에 가서 <탐라지>를 엮은 이원진 목사가 이곳 산방산에 올라 지은 시를 읊조려 본다. '큰 신령은 유다른 자취를 남기고 / 높은 스님은 삼가 산을 찾았는데 / 땅은 신의 층계를 마련하고 / 하늘의 석실 문을 열었네. / 누워서 떨어지는 단물을 맛보고 / 앉아서는 구름을 누른다. / 비단 같은 바다를 바라보느라 / 해지도록 돌아갈 줄을 모르네.' ♧

***사진 위는 절벽에 자라는 석곡(난 종류)이고, 아래는 산방산이 구름모자 쓴 모습입니다.






'오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정이오름'과 '각시바위'의 전설  (0) 2001.11.16
한라산 눈꽃 축제에 붙임  (0) 2001.11.14
'오름' 이야기를 시작하며  (0) 2001.11.14
신 동명일기(新東溟日記)  (0) 2001.11.14
청산별곡(靑山別曲)  (0) 2001.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