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문회 캄보디아 답사기
*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과 유적이 있는 곳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 킬링필드의 아픈 상처 - 왓 트마이
* 2006년 2월 18일(토) 비 온 뒤 갬.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찾은 곳은 킬링필드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왓 트마이(Wat Thmei)였다. 이는 '새로 지은 사원'이란 뜻으로 학살 터에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지은 절이다. 차가 서자마자 비는 더욱 거세게 내려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을 위무(慰撫)하는 듯하다. 우산을 들고 용감하게 먼저 내렸는데, 눈앞에 바로 유골을 모아놓은 탑이 서있다. 그 처참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지 못하게 함인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우선 위령소로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물은 발목까지 차 올라 일행이 어떻게 할지 몰라 쩔쩔맨다. 그래도 화단 옆으로 돌아 건너오기를 기다려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당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진행되었던 이 왓 트마이는 고등학교 교정이었다고 한다. 학살극의 주범은 폴 포트 정권이었다. 급진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루주를 결성한 폴 포트가 미국의 지원을 받던 론놀 정권을 몰아낸 뒤 1975년부터 4년 동안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200여만 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겠다는 생각에서 혁명에 걸림돌이 되겠다 싶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죽인 것이다. 첫 대상은 론 놀 정권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사람들과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은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겠다 싶은 지식인들은 모두 처형의 대상이 되었다 한다. 심지어는 안경 쓴 사람,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간 사람도 있다고 했다.
또, 이 학살극은 대부분 나이 어린 청소년과 학생들이 집행자로 동원되었다고 하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원래 킬링필드의 현장은 수도인 프놈펜 근교에 있지만 이곳에는 이 씨엠립 지역 처형의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이렇게 모아 놓고 위령하는 절을 지은 것이다. 나올 때까지도 비가 그치지 않아 빗 사이로 흐릿하게나마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들의 죽임이 헛되지 않게 이 나라에도 자유와 평화가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 유골을 모셔놓은 위령탑 지붕
▲ 크메르루주의 잔인성을 폭로한 영화 - 킬링필드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는 좌파 크메르루주 정권이 통치기간 동안 벌인 만행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1985년에 제작된 영국영화로, 데이비드 퍼트넘이 제작하였으며, 롤랑 조페가 감독했다. 샘 워터스톤, 행 응고르, 존 말코비치, 줄리안 샌즈 등이 출연하였고, 브루스 로빈슨(Bruce Robinson)이 각본을 쓴 159분 짜리 영화인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뉴욕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는 1972년 당시 정부군과 반군과의 전투 때 미국 공군이 잘못 행한 작전을 취재하기 위해 1973년 8월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다. 그는 뉴욕타임스지 현지 통역관인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과 함께 어렵게 현지에 가서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둘은 캄보디아가 크메르루주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에 위기를 느끼고 가족을 미국으로 탈출시키지만, 자신들은 남아서 취재를 한다. 수도 프놈펜이 함락된 후 시드니와 프란은 프랑스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대사관은 프란이 캄보디아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는다. 프란은 루즈군에게 붙잡혔다 각고의 노력으로 탈출하여 킬링필드를 지나 태국의 난민촌으로 탈출한다.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와 프란의 가족을 보살피면서 프란을 구해보려 노력하던 시드니와, 프란은 1979년 10월 9일 극적으로 재회한다.
1980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시드니 션버그 기자의 글 '디스 프란의 생과 사 - 한 캄보디아인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인데, 캄보디아 내란을 취재하던 미국인 기자와 현지인의 우정을 그렸다. 론놀의 우익(右翼)정권이 군사쿠데타로 전복되고 1975년 정권장악에 성공한 크메르루주가 4년 간의 통치기간 동안 저지른 극도의 비인간적 야만과 살상을 다루고 있다. 킬링필드(Killing Field)는 루즈 정권 때 대학살로 인해 생긴 집단 무덤을 말한다.
1985년 아카데미상에서 편집, 촬영 부문 등 3개 부문 후보로 올라 행 응고르가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주연배우였음에도 조연상을 수상하여 인종차별이라는 논란을 일으킨 행 응고르는 1996년 2월 25일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 크메르루주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영화에서 미국 영사역을 연기했던 조연 스팰딩 그레이는 영화를 찍으면서 겪었던 경험을 1인극 형식의 각본으로 썼고, 1987년 조너선 드미는 '킬링필드의 독백'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 왓 트마이에 모셔놓은 킬링필드로 희생된 유골탑에 모셔놓은 유골들
▲ 역사적 진실 - 킬링필드
보통 사람들에게 '킬링필드'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앞서 가이드가 한 설명과 같이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가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200만 명을 악랄하게 학살한 것'이라 대답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그 200만 명 중에는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한 사람이 60∼80만이 들어 있다는 주장이다.
월남전 당시 계속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른 바 호지명 루트였다. 베트콩의 사이공 지역 침투는 월남 땅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라오스와 태국의 국경을 따라 캄보디아의 대평원을 가로질러 베트남의 최남단인 메콩델타를 굽이굽이 흐르는 메콩강을 이용해 보급품이 계속 지원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전쟁을 이기는 길은 캄보디아에 있는 이 루트를 폭격하여 막으면 이긴다는 논리였다.
당시 미국은 론 놀 괴뢰정권을 세워 폭격을 모른 체하게 한 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 동안 비밀로 캄보디아 동남부 광활한 지역에 B-52 폭격기로 무려 53만 9,129톤에 해당하는 막대한 폭탄을 투여했다. 그 폭탄은 불바다를 이루는 네이팜탄, 고엽제로 악명 높은 에이전트 오렌지, 새끼를 까며 살해하는 클러스터밤(CBU)으로 알려졌다. 이건 공습경보도 없고 정해진 장소도 아닌 곳에 시도 때도 없이 퍼부은 것이다.
캄보디아 연구통인 데이비드 챈들러, 마이클 비커레이, 또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 등에 의하면, 통계는 각각 다르지만 이 때 죽은 인원이 60∼80만으로 발표하고 있다. 또 챈들러는 크메르루주가 처형한 인원수를 10만 명, 비커레이는 15만∼30만 명에다 기아와 질병, 중노동으로 죽은 이들을 약 75만 명으로, 핀란드 정부 조사보고서는 사형과 질병, 기아로 죽은 이들을 합해 약 100만 명으로 각각 밝힌 바 있다.
* 왓 트마이에서 비를 맞는 사자상
▲ 킬링필드는 1, 2차로 나눠야
엄밀히 따져 보면 킬링필드는 1969∼1973년 미군의 폭격에 의해 무고하게 학살된 60∼80만과 1975∼1979년 크메르루주가 집권하면서 학살하고 그로 인해 죽은 100만 명을 합쳐 10년 동안 학살된 인원이 약 200만 명이라는 점이다. 정문태(국제분쟁 전문기자, 아시아네트워크 팀장) 씨의 주장에 따르면, 10년 동안 학살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미군에 의해 학살된 1차 학살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아무 의심도 없이 모든 책임을 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에게 뒤집어씌운 채 공식 역사로 여기던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놓고 1997년부터 국제사회는 학살범을 처단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출발부터 미국 정부가 쥐고 흔드는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 사이에 승강이만 벌였지 정작 재판도 한번 열어보지 못한 채 5년 가까운 세월만 흘려보냈다. 재판에 회부할 사람, 재판정 설치 장소, 비용 부담, 판사 배치수, 형벌 내용 등을 조정하느라 걸린 기간이다.
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와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아메리카 속셈이 충돌했다. 훈센은 막힐 때마다 미군에 의해 학살된 사건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카드를 뽑아들었지만, 유엔과 미국 정부는 그때마다 경제지원을 들먹이며 어르고 달래 크메르루주만 학살재판 대상으로 삼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군에 의해 저지른 학살 책임자를 따지면, 누구든 당시 최고 명령권자인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안보 고문(1974년부터는 국무장관)을 지목한다. "베트콩들이 남베트남과 국경을 맞댄 캄보디아를 보급거점으로 삼아 준동하고 있다. 캄보디아 폭격으로 캄보디아 공산당(CPK)과 북베트남 연대를 끊어야 한다."고 당시 국가안보회의(NSC)를 주도하며 닉슨을 부추긴 헨리 키신저의 캄보디아 비밀폭격이 주장이 문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키신저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노래와 율동으로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평양 아가씨들
▲ 캄보디아에서 먹은 평양랭면 맛
톤레삽 호수에서 돌아온 우리는 점심 식사하러 평양냉면집에 들렀다. 이거 생전 안 먹어본 평양냉면을 2월 5일에 먹게 되더니, 꼭 2주만에 이번엔 이곳 캄보디아까지 와서 다시 먹게 되는 걸 보면, 오래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생기는구나 싶다. 그리고 월남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이곳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고 엄연히 입헌군주제의 민주국가이다.
2002년 말에 개점했다는 평양 레스토랑에는 제복을 입은 미녀 아가씨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음식을 주문하고 나르고 노래하고 춤추는 곳이었다. 뽑히어 나온 아가씨들이라 모두 예쁘고 상냥하다. 조용히 물어보았더니 모두 3년제 관광대학을 나온 집안의 빵빵한 아가씨들이란다. 3년 계약을 하고 왔다는데, 봉사학과 요리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밥은 정식 비슷한 걸 시키고, 네 사람이 앉는 식탁 하나에 냉면 하나씩 주문해 맛을 보도록 했다. 음식 나오는 것은 중국과 비슷하게 상마다 반찬이 가지가지 나왔다. 무채라든가 콩나물이라든가 우리 음식을 위주로 한 요리였다. 만두도 나오고 반찬은 얼마든지 추가가 가능하였다. 복스럽게 생긴 아가씨들은 눈웃음이라든가 입술을 생끗 벌리는 등 표정관리를 하며 친절하게 굴었다.
음식 시중이 끝나자 아가씨들은 무대로 올라가 유치원생들처럼 노래를 부르며 춤추는 동작을 한다. '반갑습네다'나 '휘파람' 등 몇 곡이 끝나고 나자 한 아가씨가 우리 가요를 부른다. 거문고를 현대식으로 개조한 악기를 연주하며 흘러간 옛노래를 거침없이 부른다. 앵콜을 연발하니 이미자나 주현미의 노래를 계속 불러댄다. 이곳은 북한당국이 직접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회사 소속이라고 했다.
* 악기로 반주 놓는 아가씨(위)와 모니터를 보고 노래 부르는 아가씨
♬ Alan Parsons Project ㅡ Eye In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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