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안녕, 사이공! 아니 호치민

김창집 2007. 1. 26. 01:12

--- 탐문회 베트남 호치민시 답사기

 

 

                    * 베트남 공산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치민이 아이를 안고있는 동상

 

▲ 호치민시로 가는 비행기에서

 

 시엠립 공항에 들어섰는데 줄을 섰던 사람들이 불만에 가득한 채로 흩어진다.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가 말도 없이 결항되었고, 늦게라도 대신 보내줘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표들은 거의 매진되어 그 많은 사람들이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이곳은 활주로의 길이 때문에 큰 비행기가 올 수 없어 작은 비행기가 오가는데 대부분 여행사의 단체 여행객은 거의 차야 운영된다. 이런 것들도 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진통이리라.

 

 우리가 가는 호치민시는 옛날 그 이름도 유명한 사이공이었다. 내가 1970년대 초에 디안에 있는 비둘기부대 파견대에 있으면서 1년 동안 나들었던 곳인데, 1973년 우리 군대가 철수하고 나자 월맹이 월남을 점령해 1976년 7월 2일 두 베트남이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통일 기념으로 베트남 공산주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의 이름을 붙여 '호치민시'로 바꾸었다. 지금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다.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에는 남한은 월남(越南)과, 북한은 월맹(越盟)과 외교관계를 가졌다. 우리나라는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해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월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1964년 9월 의무중대 파견이래 맹호, 청룡 등 한국 전투사단이 파견되어 한때 월남 파견 한국군 장병수가 4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1973년 파리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모두 철수했다.

 

 월남 주재 한국대사관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인 1975년 4월 29일 폐쇄되었고, 미처 철수하지 못했던 일부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1976∼80년에 걸쳐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밖에도 베트남 전쟁 특수(特需)를 타고 한국 기업의 진출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으며, 월남 파견 한국인 문제와 국제결혼으로 인한 한국인과 월남인의 혼혈아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월남 정권이 무너지고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후 북한은 이전 월맹 시절에 맺었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남한은 베트남 통일 후 17년만인 1992년 12월 22일 수교에 합의했다. 남한에는 월남 패망 후 공산 베트남에서 탈출한 선상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 부산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그 후 폐쇄되었다.

 

 

                              * 베트남 주석궁이 돼버린 옛날 대통령이 살던 집

 

▲ 도이모이와 베트남의 경제정책

 

 1992년 개정된 헌법에 따르면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은 국회이며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국회가 국회의원 가운데서 주석을 선출하며, 주석은 국회에 부주석, 최고인인민재판소장의 임명과 해임을 요청한다. 주석과 총리를 비롯한 각료의 임기는 국회의 임기에 따른다. 최고 상소법원은 최고인민재판소이며 하급 인민재판소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는 베트남 공산당이며 당원들이 정부 고위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정책은 전권을 가진 공산당 정치국이 결정한다. 공산당이 국회의원 후보를 선출하며 이들은 경쟁 없는 단일 후보명단으로 선거인들에게 인준 받는다. 군대는 육군·해군·공군 및 지방의 방위군·민병대·예비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으로 대체로 농업에 바탕을 둔 중앙계획경제체제를 실시하고 있다. 1975년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베트남은 비효율적이고, 더러는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경직된 농업 집산화, 국영화 정책으로 인해 경제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86년 시장원리와 성과급제 등을 경제에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민간기업의 활동을 허용했다.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자유시장 원리를 도입한 혁신안이 바로 '도이모이'인 것이다. 

 

 1994년 2월말 내가 호치민시에 찾았을 때는 20여 년 전보다 엄청나게 뒤져 있었다. 20여 년 전에 쓰던 버스는 유리창이 없었으며, 라지에터가 고장나 머리에 물통을 달고 있었다. 2달러 주고 1시간 동안 씨클로(자전거에 인력거를 매단 것)를 타고 시내를 한 번 돌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당시엔 여러 나라에서 와 호텔을 짓고, 여러 곳에 투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 호치민시의 널찍하게 넓힌 길과  빌딩들

 

  

                                                   * 줄을 맞춰 심어놓은 고무나무

▲ 구찌터널로 가는 차안에서  

 

 2006년 2월 19일 일요일 맑음
 아마라 호텔에서 묵었던 일행은 아침 식사 후 짐을 챙기고 나와 차에 싣고 거리로 나왔다. 한밤중에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거리는 훨씬 넓어졌고 모든 사람들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돼버렸지만 10여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 자전거가 주를 이루던 거리는 자동차로 바뀌어 있었고, 시민들은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빌딩이 늘어서고 길도 넓혀졌으며 깨끗하다.  

 

 구찌터널은 지난번에 왔을 때 가본 곳인데, 이곳을 이해하려면 월남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한다. 몇 년 전까지 이곳에서 우리나라로 가는 쥐치 수입총판을 했다는 땅딸막한 가이드가 이야기를 꺼낸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월맹의 게릴라 활동과 월남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의 개입을 반대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월맹은 월남에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월남 정부는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 두 전쟁에서 게릴라의 본부가 되었던 땅굴이 바로 구찌터널이다.

 

  

                                   * 옛 터널의 입구를 손뼘으로 재보고 있다.

 

▲ 구찌터널은 어떤 구조인가

 

 구찌터널은 호치민에서 75km 정도 거리로 차로 2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전쟁 당시 게릴라의 거점을 건설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굴은 3층으로 설계되어 있는데, 길이가 약 250km 정도로 2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지하 30m의 터널을 거미줄 같이 파놓아 이곳에 수십 명이 생활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식당, 숙소, 회의실 등이 마련되어있다. 

 

 베트공들은 이 터널에 숨어 있으면서 프랑스군과 미군과 대치하며 신출귀몰하게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그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베트공이 이 땅굴을 파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호미와 괭이 등과 흙을 담아내는 작은 삼태기가 전부여서, 처분해야할 흙의 양을 줄이고 작은 체구의 베트공들만 다닐 수 있도록 굴의 통로는 가로, 세로 50cm의 작은 네모꼴로 만들었다. 구찌터널의 길목엔 부비트랩들을 많이 볼 수 있어 당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 터널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 적이 이 터널을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해 놓았다. 이를테면 안에서 취사를 위해 불을 피울 때, 그 연기는 3단계의 정화과정을 거쳐 밖으로 배출 되게 했다. 그 치밀함과 세심함이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식당은 역시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되어 있는 곳으로, 여기에서는 당시 전사들이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먹었다는 '얌'이란 고구마 비슷한 음식을 먹어 볼 수 있다. 

 

 지금 구찌터널은 호치민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빠질 수 없는 관광코스가 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적개심 가득한 안내 비디오, 구찌터널 안에서의 후끈한 열기, 부비트랩의 섬뜻함 같은 것들은 전쟁 당시의 처절함과 긴박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미국의 현대화된 무기, 그리고 B29의 융단 폭격에도 끄떡없이 적을 이길 수 있었던 베트남인들의 끈기와 하나된 의지가 바탕이 된 저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장소이다.

 

 

                                            * 베트공 마네킹 옆에서 기념 촬영

 

 

                                              * 숲속에 세워 놓은 탄피

 

▲ 10여 년 동안 많이 달라진 구찌터널

 

 들길로 접어들자 달라진 베트남에 대한 정보를 구수하게 들려주던 가이드에게 청하여 급한 일도 해결할 겸, 고무나무 밭에 차를 세워 달래서 줄맞춰 심어진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게 했다. 시간상으로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들어선 건물이 낯설어 자세히 보았더니, 그 동안 휴게실과 식당, 화장실, 기념품을 파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실 별것도 아닌 건데 이렇다 할 유적지가 없다보니, 이곳에 이렇게 몰리는 것이다. 우리 팀은 굴이 있는 곳 강의장으로 가 해설 비디오를 보았다. 내용도 새로 편집되었고, 강의장도 늘었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가까운 곳에 호텔을 하나 짓고 있었고, 시설도 야외 교장처럼 임시로 단순하게 만들었었는데, 이제는 곳곳에 고정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밀림지역이었는데, 무수한 폭격과 고엽제 투여로 나무가 모두 고사되었었다.

 

 10년 전에는 곳곳에서 B29 폭격으로 파인 곳을 볼 수 있었는데, 여러 시설을 하면서 사라져 버렸고, 단일 코스였던 긴 터널도 이제는 여러 곳에 짧게 만들어 그냥 굴만 조금 통과하는 체험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곳의 흙은 특수해서 굳으면 탄력이 있을 정도로 딱딱해진다. 그래서 무너지지 않은 만년 요새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 해설할 때는 더러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앞날을 위해 숨겨둔다고 했다.

 

 나와 땀을 씻으며 나와 그곳에서 제공하는 마처럼 생긴 '얌'과 차를 마셨다. 곳곳에는 베트공의 복장을 한 남녀의 마네킹을 앉혀 놓든지 세워놓아 기념 사진을 촬영하도록 배려했다.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꾼다더니, 이런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 세워 놓은 걸 보니 많이 변하기도 했다. 나오면서 기념품 가게를 훑어보는데, 아뿔사! 이건 뭔가? 뱀술인지 알콜에 담근 기념품인지 유리병 안에 뱀과 코프라, 전갈도 있다. 
 

  

                              * 베트남 유적의 하나인 구찌터널의 휴게소

 

 

                                 * 술인지 알콜인지 코뿌라가 들어 있는 병

 

♬ Robbie Williams - Supr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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