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65

추사 유배길 1코스 - 집념의 길(3)

□ 정 마리아 묘를 나서서 묘역을 나서면 오른쪽에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상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성모님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가서 보면 한복을 차려 입었고 안은 아기는 살포시 엄마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엄마는 이제 곧 두 살 난 아들을 섬에 그냥 두고 가야 할 걸 걱정하는 수심 가득한 얼굴이다. 호송선이 잠시 추자섬 예초리에 머물자 정난주 마리아는 아들을 저고리로 싼 후 이름과 출생일을 적어 황새바위에 숨겼고, 다행히 아들 황경헌은 어부 오씨(吳氏)에 의해 구조되어 한 집안 사람으로 자라나 후손들은 지금도 하추자에 살고 있다. 여인상 아래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 새긴 글의 의미를 되새기며, 대정고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네거리에서 잠시 걷..

길 이야기 2021.01.30

추사 유배길 1코스 - 집념의 길(2)

□ 대정우물 터인 ‘두레물’을 찾아서 송계순 집터에선 어디로 가라는 표지도 없이 길이 두 갈래로 나 있다. 타지 사람들인 경우 동서남북 방향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참 난감할 것 같다. 한 번 길을 내고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마을사람들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남문 쪽에 우물터가 있다는 걸 출발지점 게시판에서 확인한 상태여서 남쪽으로 나오니, 추사로 네거리다. 우물터는 1990년대 초 삼의사비가 있을 때 한 번 와 보고, 추사 유배길 개통식 때도 왔었지만 기억이 잘 안 난다. 다행히 동쪽 골목길 진입로에 안내 표지가 있어 시행착오를 한 번 거친 끝에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전에 커다란 못 구멍 주위에 풀만 무성했던 샘은 새로 정비를 해서 돌을 깎아 계단을 만들고 물허벅 소녀상도 세워..

길 이야기 2021.01.26

추사 유배길 1코스 - 집념의 길(1)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격정의 시대를 거치면서 대정현성은 제주읍성, 정의현성과 달리 그 자취가 거의 사라져버려, 따로 떨어져 있는 대정향교를 제외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전된 것이 없었다. 그 이후 1984년에 추사유배지가 복원되고, 2010년 5월에 유배지 앞에 ‘추사관(秋史館)’이 들어서면서 대내외로 널리 알려진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그러던 중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센터장 양진건 교수)에서 ‘추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를 내걸고 3개의 답사코스를 개발하여 2011년 5월 14일에 길을 열었다. 제1코스 집념의 길, 제2코스 인연의 길, 제3코스 사색의 길로 명명된 길을 걸으면서 추사가 겪었던 유배생활을 추억하고, 그의 학문과 예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제1코스 ‘집..

길 이야기 2021.01.17

한라생태숲 숫ᄆᆞ르숲길(3)

□ 제일 먼저 물드는 사람주나무 단풍 벌써 10월 말. 숲속 나뭇잎에서도 갑자기 변화의 바람을 느낀다. 여기서 제일 먼저 붉은 빛을 발하는 것은 사람주나무와 담쟁이덩굴이다. 낮에는 괜찮지만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꽤 내려가서인지 붉은 빛이 여기저기 감돈다. 대극과의 사람주나무는 그리 흔치는 않지만 중산간 이상의 오름에서 자주 보인다. 단풍 든 모습이 사람의 홍조 띤 모습과 같다고 해서, 가운데 ‘붉을 주(朱)’자를 넣어서 이름을 붙였다는데, 단풍이 들어야만 눈에 잘 띈다. 나무에 오른 담쟁이덩굴은 아무래도 연하고, 뿌리에서 올라가는 수분이 부족해지는지 먼저 붉어졌다가 말라 떨어진다. 단풍이 물드는 시기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제주 단풍의 질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그리 시원한 편은 아니다. 그 이유는 ..

길 이야기 2020.10.31

한라산 둘레길의 단풍

모처럼 단풍 길을 걷고 왔다. 지난 주 일요일은 가족 행사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단풍 소식이 궁금했는데, 일행 모두 단풍길 가기를 소망해서 쉽게 갈 수 있는 한라산 둘레길 중 돌오름길, 그 중에서도 18임반에서 돌오름을 왕복하는 약식 코스를 택했다. 이 길은 많은 관광객들에게 알려진 길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조금 바꿔 천아수원지 방향으로 다녀왔다. 이 길도 많이 알려져 있는지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참고로 한라산 둘레길 소개를 덧붙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때여서 완전히 빨간색은 만나지 못했으나, 가을 햇빛이 밝게 비췄기 때문에 분위기는 완전히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두 번의 태풍이 이곳을 통과했기 때문에 나뭇잎들이 많..

길 이야기 2020.10.26

한라생태숲 숫ᄆᆞ르숲길(2)

□ 건강을 다지는 사람들 천천히 이것저것 살피다 멈춰 서서 메모하는데, 탐방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활개 치며 뛰듯이 지나간다.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여유를 갖고 살아야지, 이런 한적한 숲속에까지 저럴 필요가 있을까’ 하다가 한편 생각해보니, 저 사람들은 바쁜 가운데도 시간을 내어 이 먼 곳까지 건강을 다지러 왔지 싶어 일면 이해가 간다.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건강검진을 위해 문진표를 작성해 보면, ‘귀하는 땀이 몸에 배일 정도의 운동을 일주일에 몇 회 정도 하고 계십니까?’가 나온다. 땀이 몸에 배일 정도가 되어야 호흡도 가빠지게 되고 운동효과가 있다는 얘기일 터.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숫ᄆᆞ르숲길을 다 걸어도 큰 운동효과는 기대할 수 없겠다. 이 숲길은 높낮이가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

길 이야기 2020.10.10

한라생태숲 숫ᄆᆞ르숲길(1)

‘꿈꾸는 숲’, ‘생명의 숲’이란 명제를 내걸고, 2009년 9월 15일 제주시 5.16도로 2596(용강동) 소재 194ha의 부지에 개원한 한라생태숲은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도민들은 물론 전국으로 널리 알려져 탐방객들에게 교육장이자 휴식처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중 숫ᄆᆞ르숲길은 생태숲 주위를 도는 코스인데, 안내소를 출발하여 꽃나무 숲까지 4.2km에 이르며, 중간지점에서 절물자연휴양림 사이 숫ᄆᆞ르편백숲길로 이어지기도 한다. ‘숫ᄆᆞ르’는 옛 지명으로 ‘숯+마루’의 제주어식 표기인데 ‘숯을 구웠던 등성이’란 뜻이다. 이제 숯을 구웠던 가마 같은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명에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숯을 많이 사용하던 당시에는 많이 드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 사랑의 나무, 연리목 주..

길 이야기 2020.09.19

제주 조천 북촌마을 4․3길(4)

□ 처참했던 그 날의 당팟 1949년 1월 17일(음1948년 12월 19일), 북촌초등학교에서 주민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는 형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총살을 시키기 위해 주변 밭들을 이용했다. 때문에 이곳 당팟 현장으로 끌려와 100여명이 희생된 것이다. 황요범 선생의 ‘애기무덤’에는 그날 저녁 식구들의 시체를 찾는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당팟, 너븐숭이, 탯질 등지에는 쓰러져 죽어있는 모습이 마치 뽑아놓은 무처럼 갈산절산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누가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제쳐보면 외삼촌이고, 바로 보면 큰이모다. 아버지는 당팟에서 죽어있다 하고 누이는 너븐숭이에서 보았다고 한다. 몸은 하나인데 거두어야 할 시체는 동서로 흩어져 죽었다. 열아흐레 푸른 달빛을 횃불삼아 밤새도록 찾아 헤매어도..

길 이야기 2020.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