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밤꽃 사이에 들다

김창집 2015. 6. 12. 13:42

 

어제 깁스를 풀고

오늘 물리치료 받으러

샛길로 병원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는데,

주위로 가득한 밤꽃 향기의 유혹을 견딜 수 없어

휴대폰으로 몇 컷 찍었습니다.

 

근데 저 길쭉한 꽃이

어떻게 토실토실한 밤이 되는지

꽃 지고 자그마한 밤송이가  그 끝에서 솟아날 때라야

알게 됩니다.

 

하기사

우유보다도 묽은 정액이

그리 크지도 않은 난자를 만나

별의별 용모와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도 태어나게도 하는데,

어찌 조물주의 섭리를 헤아릴 수나 있겠습니까?

   

 

♧ 밤꽃 - 권도중

 

밤꽃 밤에 핀다 수태하고픈

흔들리는 수태성

낮은 언덕 모퉁이 등불 켜지듯

우물 곁 물 묻은 두레박

여인의 치마그늘로 긴 구렁이의 흔적

끝에 묻은 잉크 같은 질량의 달빛 반사 속에

꿀럭꿀럭 징그러운 꽃

 

우윳빛 하얗게 자빠뜨려진 주변으로 향이 머문다

계곡을 만들고 위안을 간다

머리칼 속으로 번진다

 

뜰 안 마을 안엔 밤나무를 심지 않았다

아끼는 여인을 밤꽃 밑에 두지마라

그 향에 취하면 어쩌랴 밤에 밤꽃 비릿하다

 

 

♧ 밤꽃 - 최남균

 

청양에서 정안까지

줄곧 따라붙어

줄행랑이라도 부른 것으로 아는 것일까

불효자식 시야를 타박하는구나

밤꽃 향의 행렬

꽃상여의 영여靈輿처럼

앞을 가로지른 산하여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의 색 바랜 눈물로

누렇게 만개한 산하여

네 어미의 치매에 핀 욕창褥瘡이

이처럼 붉게 피었을까

이 계절에

부소산 가는 찻길

철없이 웃는 코스모스가

어디 너만 못할까.

 

결실을 위한

벌목이 골짜기마다

화려한 꽃 그림 장식하고

삶이 여물어가듯 지는

내 어머니 같은

꽃이여.

 

 

♧ 밤꽃 무렵(사춘기) - 김정호

 

고향 뒷산에

밤꽃 허벅지게 피는 날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이웃집 숙이 누나

한산모시 저고리 속으로

희고 깨끗한 봉오리를 보았다

부끄러움 없이

하르륵 하르륵 거리는 꽃잎

 

밤꽃 지기 시작한

어느 날 새벽

숙이 누나

아무도 몰래

고향을 떠났다는

소문 무성하더니

그날 이후

내 잔 몸 위에도

허연 꽃부스럼 돋아나고

   

 

♧ 밤꽃 흐드러진 달밤의 유혹 - 김내식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밤꽃이 흐드러진 밤에

은밀한 유혹이 춤을 추는데

왜 돌아눕나요

 

바람의 욕구가 밀려오는데

밤꽃이 하얗게 꼬리치는데

뜬 눈을 감는다고

잠이 오나요

 

누군가 살며시 논둑을 걸어가고

개구리 우는소리 일제히 들려오면

가만히 뒷문을 빠져나와

산으로 올라오세요

 

그날 밤의 밤 숲에서는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밤꽃 냄새가 모든 비밀을

감추어 줄 거예요

   

 

♧ 밤꽃 피는 계절 - 槿岩 유응교

 

오매!

환장 허것네.

싱그러운 풀 이파리에

박가 분 풀어 놓았나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유월의 농밀한 유혹

말미잘의 풋풋한 내음으로

옷고름 풀어 헤친

저 까실까실한 가슴을 보게

 

밤꽃은 언제나

밤에만 사랑을 나누고

밤에만 욕정을

불태울 줄 알았는데

대낮초장부터

이게 뭐람?

푸른 유월의 숲 자락에

쏟아 놓는

저 은밀한 향기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저 새댁

그냥 못 지나겠네.

눈웃음 살살치는 앞집 순 이도

엉덩이 탱글탱글한 뒷집 월촌 댁도

인터넷 채팅에 늦바람난 옆집 철이 엄마도

그냥은 못 지나겠네.

 

유월 초봄

집집마다

베개 던지는 소리

사리문 밀치고

내닫는 사랑싸움

골목길마다 흥건하겠네.

밤꽃 피는 이 계절에...

   

 

♧ 밤꽃 동네에 들다 - 조성심

 

  밤꽃 동네를 스쳐 지나가려 했는데 그만 붙잡혔습니다. 나를 붙잡은 것은 넉넉하고 푸근한 이웃 아짐의 손길이었습니다.

 

  푸르른 산야에 널려 있는 밤꽃은 제때를 참 잘 맞추었습니다. 먼 빛으로 보면 그게 연초록 잎의 물결이지 어디 꽃이라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바탕 어지럽게 봄꽃잔치가 끝나고 아카시아가 꽃눈으로 휘날리며 사그라진 후에야 아 그렇지요 이젠 꽃철이 지났노라고 눈을 멀리 들어올릴 때 밤꽃은 무더기로 피어 눈을 붙잡았습니다.

 

  우리가 언제 즐거울 때 신날 때 고향을 찾았습니까? 등이 시리고 허전하며 발길이 둥둥 떠서 허방을 짚을 때 나도 모르게 찾아가게 되지요. 그러다 동네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아짐이야말로 부모님과 진배없이 도타운 정을 주지요.

 

  밤꽃 길을 들어서면 그 길이 쉽게 끝나지 않기에 마음 한 자락을 편안히 풀어놓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밤꽃 내음을 흠뻑 들이마신다면 부러 배를 채우지 않아도 한없이 넉넉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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