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깁스를 풀고
오늘 물리치료 받으러
샛길로 병원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는데,
주위로 가득한 밤꽃 향기의 유혹을 견딜 수 없어
휴대폰으로 몇 컷 찍었습니다.
근데 저 길쭉한 꽃이
어떻게 토실토실한 밤이 되는지
꽃 지고 자그마한 밤송이가 그 끝에서 솟아날 때라야
알게 됩니다.
하기사
우유보다도 묽은 정액이
그리 크지도 않은 난자를 만나
별의별 용모와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도 태어나게도 하는데,
어찌 조물주의 섭리를 헤아릴 수나 있겠습니까?
♧ 밤꽃 - 권도중
밤꽃 밤에 핀다 수태하고픈
흔들리는 수태성
낮은 언덕 모퉁이 등불 켜지듯
우물 곁 물 묻은 두레박
여인의 치마그늘로 긴 구렁이의 흔적
끝에 묻은 잉크 같은 질량의 달빛 반사 속에
꿀럭꿀럭 징그러운 꽃
우윳빛 하얗게 자빠뜨려진 주변으로 향이 머문다
계곡을 만들고 위안을 간다
머리칼 속으로 번진다
뜰 안 마을 안엔 밤나무를 심지 않았다
아끼는 여인을 밤꽃 밑에 두지마라
그 향에 취하면 어쩌랴 밤에 밤꽃 비릿하다
♧ 밤꽃 - 최남균
청양에서 정안까지
줄곧 따라붙어
줄행랑이라도 부른 것으로 아는 것일까
불효자식 시야를 타박하는구나
밤꽃 향의 행렬
꽃상여의 영여靈輿처럼
앞을 가로지른 산하여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의 색 바랜 눈물로
누렇게 만개한 산하여
네 어미의 치매에 핀 욕창褥瘡이
이처럼 붉게 피었을까
이 계절에
부소산 가는 찻길
철없이 웃는 코스모스가
어디 너만 못할까.
결실을 위한
벌목이 골짜기마다
화려한 꽃 그림 장식하고
삶이 여물어가듯 지는
내 어머니 같은
꽃이여.
♧ 밤꽃 무렵(사춘기) - 김정호
고향 뒷산에
밤꽃 허벅지게 피는 날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이웃집 숙이 누나
한산모시 저고리 속으로
희고 깨끗한 봉오리를 보았다
부끄러움 없이
하르륵 하르륵 거리는 꽃잎
밤꽃 지기 시작한
어느 날 새벽
숙이 누나
아무도 몰래
고향을 떠났다는
소문 무성하더니
그날 이후
내 잔 몸 위에도
허연 꽃부스럼 돋아나고
♧ 밤꽃 흐드러진 달밤의 유혹 - 김내식
휘영청 달 밝은 밤에
밤꽃이 흐드러진 밤에
은밀한 유혹이 춤을 추는데
왜 돌아눕나요
바람의 욕구가 밀려오는데
밤꽃이 하얗게 꼬리치는데
뜬 눈을 감는다고
잠이 오나요
누군가 살며시 논둑을 걸어가고
개구리 우는소리 일제히 들려오면
가만히 뒷문을 빠져나와
산으로 올라오세요
그날 밤의 밤 숲에서는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밤꽃 냄새가 모든 비밀을
감추어 줄 거예요
♧ 밤꽃 피는 계절 - 槿岩 유응교
오매!
환장 허것네.
싱그러운 풀 이파리에
박가 분 풀어 놓았나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유월의 농밀한 유혹
말미잘의 풋풋한 내음으로
옷고름 풀어 헤친
저 까실까실한 가슴을 보게
밤꽃은 언제나
밤에만 사랑을 나누고
밤에만 욕정을
불태울 줄 알았는데
대낮초장부터
이게 뭐람?
푸른 유월의 숲 자락에
쏟아 놓는
저 은밀한 향기
젊은 나이에 홀로 된 저 새댁
그냥 못 지나겠네.
눈웃음 살살치는 앞집 순 이도
엉덩이 탱글탱글한 뒷집 월촌 댁도
인터넷 채팅에 늦바람난 옆집 철이 엄마도
그냥은 못 지나겠네.
유월 초봄
집집마다
베개 던지는 소리
사리문 밀치고
내닫는 사랑싸움
골목길마다 흥건하겠네.
밤꽃 피는 이 계절에...
♧ 밤꽃 동네에 들다 - 조성심
밤꽃 동네를 스쳐 지나가려 했는데 그만 붙잡혔습니다. 나를 붙잡은 것은 넉넉하고 푸근한 이웃 아짐의 손길이었습니다.
푸르른 산야에 널려 있는 밤꽃은 제때를 참 잘 맞추었습니다. 먼 빛으로 보면 그게 연초록 잎의 물결이지 어디 꽃이라 이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바탕 어지럽게 봄꽃잔치가 끝나고 아카시아가 꽃눈으로 휘날리며 사그라진 후에야 아 그렇지요 이젠 꽃철이 지났노라고 눈을 멀리 들어올릴 때 밤꽃은 무더기로 피어 눈을 붙잡았습니다.
우리가 언제 즐거울 때 신날 때 고향을 찾았습니까? 등이 시리고 허전하며 발길이 둥둥 떠서 허방을 짚을 때 나도 모르게 찾아가게 되지요. 그러다 동네 어귀에서 만나게 되는 아짐이야말로 부모님과 진배없이 도타운 정을 주지요.
밤꽃 길을 들어서면 그 길이 쉽게 끝나지 않기에 마음 한 자락을 편안히 풀어놓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밤꽃 내음을 흠뻑 들이마신다면 부러 배를 채우지 않아도 한없이 넉넉해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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