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인쇄소에 갔다가
친구 아버님 문집(文集)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 학창시절에
친구네 집을 많이 방문해 자주 뵈었기로
아들 친구로 스스럼없이 대하셨다.
말하면 잘 아실 정도의 직장 책임자로
일도 많이 하셨고,
취미삼아 하시던 시조창으로
명인 칭호를 받으셨던 분이시다.
이제 우리가 그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참 인생을 부지런히 사셨던 분으로 생각된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조문 가서 받은
문집 ‘만경집’이 있다.
처음에는 시조창(時調唱)에 매료되어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장원을 여러 번 계속한 끝에
명인(名人)이 되셨다.
두 번째는 서예(書藝)다.
집에 가보면 마루에 줄을 여럿 매어놓고
글씨 연습한 종이를 널어놓은 것이 끊기는 날이 없었다.
아버님이 훈장(訓長)을 하시고 명필(名筆)이셔서
손자까지 대를 이어 여덟 폭 병풍을 완성하는
꿈을 가지고 계셨다. 바람대로
전국 서예로 이름 있는 분들과 교류할 정도의 위치에 이르셨고,
아드님인 내 친구도 남들을 지도하고 있다.
세 번째는 한시(漢詩)다.
서예를 하시면서 어느 정도 가까이 하긴 했지만
정년퇴임 후 정식으로 사사 받고 향교에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만큼 즐겨 쓰셨고,
한시집인 ‘晩耕集(만경집)’을 낸 것이다.
네 번째는 한방(韓方)이다.
그 중에 침술(鍼術)에 매료되어 방안에 혈과 맥을
나타낸 인체도를 걸어놓고 계셨는데,
시술(施術)을 할 기회가 없어서
언제나 나만 보면 ‘어디 아픈 데 없느냐?’고
물어보셨다.
한시 문집 뒤쪽을 보니,
제주어로 쓰신
시조 4수를 실으셨다.
네 수 모두 교훈을 주는 내용이어서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해설을 곁들여 이곳에 소개해 본다.
저 세상에 계신 친구 아버님께서
‘어허, 게난 창집이가 나 글에 토 ᄃᆞᆯ안 올려서.’ 하고
반가워했으면 좋겠다.
♧ 들락날락 – 癸酉 저슬
아흰 때 얼먹어사
요그민 요망지곡
두린 떼 호강ᄒᆞ민
ᄆᆞᆫ 큰 뒤 몰명ᄒᆞ난
게메선 바당을 보나네
싸사 드는 걸라고
*우리는 흔히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아이 때 고생해야/ 자라서 야무지고, 어린 때 호강하며 크면/ 다 자란 뒤 미련해진다.’는 얘기다. ‘바닷물을 보면 써야(물이 나가야) 결국 들더라’는 자연의 이치를 끌어들였다. # '요그문 요망지곡' 요는 모두 'ㅇ..'임.
♧ 질로 ᄒᆞ심 – 癸酉 저슬
이녁이 쇠촐 비난
아픈 눈 쓰러가듯
놈 빌언 조 싱그난
헌 맥에 불치 담듯
게메선 아명 ᄀᆞᆯ아도
지냥으로 ᄒᆞ여사
*‘스스로 하라’는 표제처럼 모든 일은 내가 할 일이 있고 남이 해줘도 되는 일이 있듯이 ‘스스로 소꼴을 베니/ 아픈 눈이 다 나은 것 같고/ 남을 빌어 조의 묘종을 심으니/ 헌 멱서리에 재를 닮는 것처럼(남을 게 없더라)’ ‘그러니 아무리 말해도/ 제 할 일은 스스로 해야 된다’는 교훈을 실제 일에서 얘를 들고 있다.
♧ 어떵ᄒᆞ젠 – 癸酉 저슬
이ᄎᆞ록 호강ᄒᆞ당
무리민 어떵ᄒᆞ젠
무리영 간세ᄒᆞ당
썩으민 어떵ᄒᆞ젠
썩어도 ᄆᆞᆫ 놀당 망ᄒᆞ민
어떵ᄒᆞ젠 ᄒᆞ염쏸
*‘이렇게 호강하다가/ 몸이 다 상해버리면 어쩌려고’ 즉 움직여야 건강에도 좋고 몸이 튼튼해진다. ‘그렇게 됐는데도 게을리 했다가/ 못 쓰게 되면 어쩌려고 하느냐’, 결국 못 쓰게 될 정도로 몸을 망쳐 버리는 걸 걱정해서 ‘건강에 부지런히 힘쓰라’는 교훈으로 보인다.
♧ 내 ᄒᆞ리 탓 – 乙亥 영등ᄃᆞᆯ
부지런 ᄒᆞ여그네
못ᄒᆞᆯ 일 어디 시멍
간세만 ᄒᆞ여그내
되는 일 어디 시리
어즈버 모든 일 됨됨이
내 ᄒᆞ리 탓일라고
*표제어 ‘내 ᄒᆞ리 탓’은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부지런해서/ 못할 일이 어디 있으며/ 게으르기만 해서/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아, 모든 일 됨됨이가/ 제 하기 나름이더라’는 교훈이 들어 있다.
*글 : 김관옥『晩耕集』(풍신인쇄사, 2002)에서
*사진 : 제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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