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빛 – 오창래
-전기스탠드
지레 족은* 전기스탠드 힐끔 위를 쳐다 본다
천정에 붙은 저 건 자신보다 훤하다고
때로는 토라진 듯이 꾸벅 졸다 눈 비빈다
그래도 뭘 읽기엔 내 시력이 별로라서
작은 네가 아니면 밤에 독서 어렵기에
미니라 투정치 말라 응원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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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레 족은 – ‘키 작은’의 제주어
♧ 호박 한 덩이 - 고해자
어쩌다 호박잎이 감나무에 올랐는지
비바람 천둥 번개 가마솥 땡볕까지
한 송이
꽃 속에 담아
저렇게 피었을까
어느새 감잎들이 훌훌 낙엽 되는 순간
감나무 감춰뒀던 대롱대롱 저 호박
내 아들
엉덩짝만한
대롱대롱 저 호박
땅이 힘이 센지 하늘이 힘이 센지
감나무와 가지가 꺾일 것만 같은 가을
아차차
호박 한 덩이에
세상이 깨어질라
♧ 꽃무릇 - 윤행순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는 걸까
서해안 도는 길에 더 버릴 게 없어라
불갑사 꽃무릇마저 소신공양 하는 날
내 가슴 한 켠에도 절 한 채 지어볼까
꽃 지면 잎 튼다는 이해 못할 법문처럼
이대로 명치 한 끝이 저려 오는 사람아
♧ 오늘은 꼭 사야 - 양시연
믿고 따랐지만 허무할 때가 있다
주일 아침 교회마저 문 닫는다는 소식에
약국 앞 긴 행렬 끝에 나도 함께 파도친다
이별의 손수건은 한 번 흔들면 그만인데
어디서 건너왔나, 이 지독한 사랑아
온 섬을 흔들어놓고 시침 떼는 사랑아
기필코 오늘 나는 마스크를 사야한다
느닷없는 감염병 막자는 게 아니라
휘파람 나의 고백을 숨기려는 것이다
♧ 어떤 족속 – 양상보
족보를 따져보니
유채꽃은 양귀비 족속
벌 나비 넘나들면
꽃마다 신방이네
늦바람,
꼬투리 잡힐까
향기로 향기를 잡네
♧ 내게도 한 방은 있다 - 장재원
느닷없이 오늘도
어김없이 당했다
이래봬도 샌드백에 길들인 주먹인데
아직은 가슴에 품은 주먹이 울고 있다
감히 제 얼굴을 왜 뻔히 보느냐는 듯
오늘은 잔소리할 게 그렇게도 없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다
수염이나 깎으라 한다
한때는 노란 봉투에 굽실대던 여잔데
연금에 빨대 꽂고도 아직 성에 안 찼나보다
뒤돌아 거울을 보며
‘내게도 한 방은 있다’
♧ 까치무릇 - 오은기
이른 봄
블랙커피에 별 몇 개를 녹인다
꿈을 꾸지 않아도
내 뜬눈에 보인다
고근산
어느 무덤에
까치무릇 지저귈라
♧ 참깨꽃 택배 – 이미순
가야지 가봐야지 몇 년째 별렀는데
섬에 산단 핑계로
올해도 또 못 갔네
오늘은 어머닌 생신
내가 선물 받아드네
이 골 저 골 방물장수
마흔에 산 자갈밭
산골짝 비틀비틀 논틀밭틀 그 길마저
참깨꽃 어정칠월에
어정어정 피었을라
산새소리 백구소리 그리고 냇물소리
그 소리 빻아 짜낸 이홉들이 참기름
덤으로 신문에 실린
고향 소식 받아드네
*정드리문학 제9집 『내게도 한 방은 있다』(다층, 2021)에서
*사진 : 제주도의 꽃나무 '참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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