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드리문학' 제9집의 시조(2)

김창집 2021. 5. 20. 13:05

불빛 오창래

   -전기스탠드

 

지레 족은* 전기스탠드 힐끔 위를 쳐다 본다

천정에 붙은 저 건 자신보다 훤하다고

때로는 토라진 듯이 꾸벅 졸다 눈 비빈다

 

그래도 뭘 읽기엔 내 시력이 별로라서

작은 네가 아니면 밤에 독서 어렵기에

미니라 투정치 말라 응원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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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레 족은 키 작은의 제주어

 

호박 한 덩이 - 고해자

 

어쩌다 호박잎이 감나무에 올랐는지

비바람 천둥 번개 가마솥 땡볕까지

한 송이

꽃 속에 담아

저렇게 피었을까

 

어느새 감잎들이 훌훌 낙엽 되는 순간

감나무 감춰뒀던 대롱대롱 저 호박

내 아들

엉덩짝만한

대롱대롱 저 호박

 

땅이 힘이 센지 하늘이 힘이 센지

감나무와 가지가 꺾일 것만 같은 가을

아차차

호박 한 덩이에

세상이 깨어질라

 

꽃무릇 - 윤행순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는 걸까

서해안 도는 길에 더 버릴 게 없어라

불갑사 꽃무릇마저 소신공양 하는 날

 

내 가슴 한 켠에도 절 한 채 지어볼까

꽃 지면 잎 튼다는 이해 못할 법문처럼

이대로 명치 한 끝이 저려 오는 사람아

 

오늘은 꼭 사야 - 양시연

 

믿고 따랐지만 허무할 때가 있다

주일 아침 교회마저 문 닫는다는 소식에

약국 앞 긴 행렬 끝에 나도 함께 파도친다

 

이별의 손수건은 한 번 흔들면 그만인데

어디서 건너왔나, 이 지독한 사랑아

온 섬을 흔들어놓고 시침 떼는 사랑아

 

기필코 오늘 나는 마스크를 사야한다

느닷없는 감염병 막자는 게 아니라

휘파람 나의 고백을 숨기려는 것이다

 

어떤 족속 양상보

 

족보를 따져보니

유채꽃은 양귀비 족속

 

벌 나비 넘나들면

꽃마다 신방이네

 

늦바람,

꼬투리 잡힐까

향기로 향기를 잡네

 

내게도 한 방은 있다 - 장재원

 

느닷없이 오늘도

어김없이 당했다

이래봬도 샌드백에 길들인 주먹인데

아직은 가슴에 품은 주먹이 울고 있다

 

감히 제 얼굴을 왜 뻔히 보느냐는 듯

오늘은 잔소리할 게 그렇게도 없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다

수염이나 깎으라 한다

 

한때는 노란 봉투에 굽실대던 여잔데

연금에 빨대 꽂고도 아직 성에 안 찼나보다

뒤돌아 거울을 보며

내게도 한 방은 있다

 

까치무릇 - 오은기

 

이른 봄

블랙커피에 별 몇 개를 녹인다

 

꿈을 꾸지 않아도

내 뜬눈에 보인다

 

고근산

어느 무덤에

까치무릇 지저귈라

 

참깨꽃 택배 이미순

 

가야지 가봐야지 몇 년째 별렀는데

섬에 산단 핑계로

올해도 또 못 갔네

오늘은 어머닌 생신

내가 선물 받아드네

 

이 골 저 골 방물장수

마흔에 산 자갈밭

산골짝 비틀비틀 논틀밭틀 그 길마저

참깨꽃 어정칠월에

어정어정 피었을라

 

산새소리 백구소리 그리고 냇물소리

그 소리 빻아 짜낸 이홉들이 참기름

덤으로 신문에 실린

고향 소식 받아드네

 

 

                            *정드리문학 제9내게도 한 방은 있다(다층, 2021)에서

                                         *사진 : 제주도의 꽃나무 '참꽃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