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길에 서서
걸어서 갈수 없어 아름다운 길
눈부터 취해 가슴까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도 갈 수 없는 길
안개 속으로 구름 속으로 헤매고 있었습니다
눈으로 입술로 가슴으로도 못 가는 길
가까워도 멀기만 해 어둠 속 둥둥 떠 있었습니다
내 생生의 이물과 고물 사이 가지 못할 길 위로
그리움은 다리를 절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는 길은 가지 말아야 할 길
그 길을 아내가 홀로 가고 있습니다.
♧ 병원길
아내랑 병원에 갑니다
어디 가느냐 열 번을 묻습니다
왜 가느냐고 또 묻고 묻습니다
그 물음을 나는 가슴에 묻습니다
병원에 간다
의사 만나러 간다 해도
아내는
묻고 또 묻고
그럴 때마다 나는 묻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늘대는 버들가지처럼
흔들리는 내가 바보겠지요
그래도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손잡고 병원 길을 올라갑니다
인생 한 번 살았다고
인생을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지나친 길이라고
다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느작아느작 흔들리며 병원으로 들어갑니다.
♧ 흔적
여기저기 부딪치다
세월은 가고
뜨거웠던 피
퍼렇게 맺혀
멍한
내 생의 하오
말간 물빛으로
하늘에 어리는
나의 그림자
짧은 허상으로
사라질 내 삶의
흔적
하나, 하나, 지우려
잦아드는
마지막, 나의
적빈을 흔드는
아내가 늘인
흐린 그림자
하나.
♧ 노래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
♧ 짝
절망과 희망은 한집에 삽니다
슬픔과 기쁨은 같은 이름입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위아래일 뿐입니다
미움과 사랑은 본시 한 몸입니다
삶과 죽음도 한 길의 여정입니다
앞과 등이 따로 보일 뿐입니다
크게 보이고 작게 보일 따름입니다
짚신도 짝이 있듯
하물며 짝이 아닌 게 없고
손바닥도 마주쳐 짝짝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아내는 지금
고장난명孤掌難鳴의 외손뼉을 치며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 행복
몸 안의 철이 다 빠져나갈 때
우리는 철이 든다 합니다
철이 난다 합니다
그러니 들고 나는 것이 하납니다
한때는 불 속으로 들어가
설레고 안달했지마는
이제는 은은한 염불소리
물빛으로 흐르는 속에
영혼의 빈자리마다
난초꽃 한 송이 피워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흘러가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따뜻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떴습니다
아내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갑니다.
* 시 :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 (놀북, 2021)에서
* 사진 : 해오라비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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