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남대희 시집 '나무의 속도'의 시(2)

김창집 2021. 9. 25. 23:54

갈대와 호수

 

  서로 마주 보며 흔들리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한 점 바람에도 우린 출렁이고 흔들렸지요. 다가올 듯 다가올 듯 언제나 발끝에서 멈춰 서는 그대 발길, 난 허기지고 갈증만 났지요. 하지만 흔들리지 않으려고 물컹한 강바닥을 얼마나 움켜쥐고 있었는지 그대는 알까요? 이제 내 몸은 말라 서걱거리는 뼈마디와 거칠게 쇠어버린 머리채가 쉰 소리를 내며 우는데 그대는 지난겨울 몸 얼려 단단히 흔들리지 않겠다던 맹세도 한 시절뿐 건너편 산기슭에 분홍빛 진달래 한들거리자 찰방찰방 몸 녹여 그림자를 품네요.

 

감나무가 보이는 카페, 알바 모집

 

이태백이란 신조어가 나완 무관하리라는 생각은 착각이었어

알바공화국에도 봄은 왔는지

카페에는 비발디의 봄이 흐르고

까치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에

산수유꽃이 노란 왕관을 쓰고 찾아왔어

 

빈 감나무는 허기진 모습이야

걱정이 많은지

반듯하게 뻗은 가지초리 하나 없어

야윈 품에 옥탑방 같은 성긴 까치집

주름진 바람만 숭숭 지나다니고

매일 밤 언덕 아래로 굴러오는 불빛만은

커피처럼 따뜻했어

 

테이블보에 수놓인 하얀 나비가

호로롱 날아오르더니, 이력서 행간을 흘깃 훑고는

감나무밭을 지나 봄볕 속으로 사라졌어

투명한 창 넘어 들어온 감나무 그림자

따뜻한 커피 잔에 찬 손을 비비고 있었어

 

면접 결과는 주말쯤 알려 준다고 했어

 

결로

 

찬바람 스며들까

창문 꼭꼭 닫고 살았더니

배름박 땀 뻘뻘 흘리며

벽지를 흥건히 적시고 있네

 

세상 어디에

시리고 부끄러운 상처 한 줄쯤

가슴에 담아보지 않은 이 있을까

 

마음 문 꼭꼭 닫아 두지 마라!

 

가슴팍에

물 줄줄 흐를라

 

노을

 

고요한 호숫가

굴참나무 이파리

날렵하게 수면으로 내려앉으면

호수는 부드러운 경계를 만들고

지나던 바람 그 경계를 흔들어 파문을 낸다

산그림자 슬며시 지나간 자리

물잠자리 얇은 날갯짓으로 수를 놓고

붉은 하늘 통째로 들어와 앉은

호수의 심연은 뜨겁다

 

네 붉은 가슴에 내 마음

곤두박질할 때

너는 출렁이는 호수였다

 

감물 가는 길

 

1

 

  들꽃들이 융단을 깔았다 아지랑이가 익어 화염같이 이글거렸다

  옛날부터 있던 키 낮은 다리 옆으로 육중한 콘크리트 교각이 작업반장같이 서 있었다 키 낮은 다리엔 이끼가 끼어 있고 다리 아래로 세월을 가득 실은 종이배가 흑백사진으로 지나가고, 강물은 교각을 휘감아 돌고 있었다 흐르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나도, 흐르다 흐르다 교각 하나 휘감고 돌고 있는 중이다

 

2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고, 은사시나무잎이 손거울을 비추는 개울을 건너면 붉은 속살을 드러낸 황톳길이 뒷걸음질을 치며 굴참나무 숲으로 몸을 숨겼다 길에는 책보따리를 등에 메고 장수하늘소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낯익은 소년이 검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언제나 그렇게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3

 

  감물분교는 굴참나무 숲이 끝나는 언덕 위에 올빼미같이 앉아 있었다 밤마다 별들이 담을 넘고 여린 꿈에 이슬을 뿌려주곤 했었다 분교의 양철지붕과 단칸 교실은 흔적이 없고, 터무니없이 작은 공터는 휭했다 명자는 국밥집 아지매가 되었고, 대호는 선장이 되었고, 임수는 목장 주인이 되었고 영수는 이미 둥근 동산이 되었다 나는 사평역만 찾아다니다가 기차는 놓치고 시의 꽁무니만 쫒아다니는 것이다

 

 

                                      *남대희 시집 나무의 속도(도서출판 움, 2015)에서

                                                        *사진 : 한라돌쩌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