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사랑을 꿈꾸지 않더라도
비는 내리지 우리가 사랑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꽃은 피고
바람은 발걸음을 살금살금 옮겨놓지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더라도
있는 자리에서 사물들은
제 힘껏 삶을 살아나가지
그러나 친구여, 세상 쓸쓸함과
고뇌, 안개 낀 날의 방황
갯벌에 처박혀 있는 폐선과도 같이
외홀로 상처 입는 사람들
우리가 어깨 겯고 볼 부비며
허름한 사랑 한 조각
나눠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씩 추위를 벗으리
비는 아주 맛있게 내리고
꽃들은 황홀하게 비의 숨결에 취하며
바람은 크고 따뜻한 손길로 모든 것을 쓰다듬으리
친구여,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를 불러준다면
♧ 서둘지 않아도
서둘지 않아도 잎새들은
저를 피워낸 나무와 결별을 한다
서둘지 않아도 태양은 긴 그림자를
남길 것이며
때로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할 것이다
서둘지 않아도 바람은
가다가 돌아오며
먼저 간 바람의 소식도 간간이 전해줄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바람의
맨 얼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둘지 않아도
흰 눈의 군단의 텅 빈 하늘을
수놓는 것을 보라 어디선가는
이름을 접은 새 한 마리
비스듬히 세상을 그으며 날아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언 땅 밑에서도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물의 꿈이 앙상한 나무들은 여전히 서있게 한다
서둘지 않아도 잎새들이 나무들과 결별한
그 자리에 새롭게 움이 돋아날 것이다
♧ 기막힌 시
미술관 자원봉사 가서
설치미술전 지킴이 하다가
관람객 안내하고 자리 돌아와 보니
내 앉았던 의자
잠시 읽다가 놓아둔 산문집
나대신 고즈넉이 앉아 있는데
하! 그게 기막힌 설치미술이더라
그러고 보니
오래전 바닷가 모래밭
그대 고요히 앉았던 그 자리
하! 그게 진짜 시였던 것인데
그때 숨죽이며 불어오던 바람 소리와
그대 눈동자 속 주춤주춤 지던 노을빛
이게 다 시였던 것인데
오래전 그곳 바닷가 모래밭
그대 앉았던 자리
물새들이 종종종 발자국을 찍던
그 따순 온기야말로
내 어쭙잖은 시 나부랭이 같은 건 턱도 없는
참 기막힌 시였는데!
진짜배기 시였는데!
♧ 비
비는 서로 몸을 섞지 못 한다
지척 간에도 오리무중이다
오종종 조막손을 힘겹게 내밀지만
쉼표 하나의 간격도 무한대이다
비는 비끼리 몸을 섞지 못 한다
간혹 마음의 모스부호를 띄울 뿐
닿지 않을 그리움으로
슬프게 젖어서 산다
비는 비끼리 몸을 섞지 못 하지만
그러나 오랜 그리움으로
풀잎을 적시고 마른 나무들을
적시고 온 세상의 목마름을 채우므로
비로소 한 몸으로 섞여 흐른다
♧ 군고구마
첫눈 오는 날
따끈따끈하게 잘 익은
군고구마가 되어
너의 시린 두 손에
나를 온전히 쥐어주고 싶었다
♧ 불씨
초빙(初氷) 무렵
어둠은 길고 날은 추워서
그대와 내가 떨어져 서 있는 거리만큼
미미한 체온의 기미만으로
서로를 겨우 확인할 때
느닷없이 그대가 내어준
입술의 불꽃!
그 순간은 아마도 먼 곳 시린 별빛조차
그대와 나의 둥그런 어깨에 내려와
잠시 숨을 가다듬었을 게다
운명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울울불락(鬱鬱不樂)의 날에도
내가 융융(融融)한 미소를 그나마 간직할 수 있는 건
그때의 불시가 내 푸른 정맥 속
가없이 흘러 늘 처음처럼
불을 지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삶창시선, 2021)에서
*사진 : 인제 방태산의 늦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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