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4)와 연분홍 광대나물

김창집 2023. 3. 22. 01:38

 

 

石花 - 조성례

 

 

몸이 문을 닫았다

꽃이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의 마법은 없다

 

붉은 살을 잃고

몸은 석회질로 단단해지며 우울이 차올라

빈껍데기처럼

날카로워져 있다

 

호숫가 산책길

나의 여린 뿌리를 받아주었던

갯바위

날카로워진 나에게 상처를 입으면서도

함께 달려 준다

 

등에 기대어 보면

그의 심장 소리, 저 심장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던 날처럼

쿵쾅거린다

 

땀에 젖어서 땀에 젖어서

나에게 유일한 사내가

꽃이라고 불러주는

이 위안의 시간

내 안의 마른 꽃들이

깊은 생각에 잠긴다

 

 

 

 

감자의 날들 김나비

 

 

오늘 나는 쪼글거리는 감자

검은 방 안에서 습관처럼 눈을 뜨고 눈을 감죠

밀어 올린 가느런 싹이 어둠 속 자모字母를 더듬어요

망각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나의 실수는 무엇인가요

 

저녁 드세요

바람 부는 저녁 토리노 외딴집**

 

감자, 감자는 삶이고 죽음

아버지와 딸은 감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요

괴괴한 바람과 축축한 어둠이 창밖에 걸어 다니죠

길게 자란 밤이 집안을 노려보고

바람은 중유*** 속에 떠도는 영혼의 손을 잡고 춤추죠

 

밖에서 안을 보면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을까요

안은 텅 빈 감자 상자

나는 무엇으로 나를 채워야 하나요

매일 식은 감자의 시간을 걸어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곳은 어디인가요

 

여섯째 날 아버지와 딸은 생감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요

먹어라 먹어야만 해

아버지의 시적시적한 목소리 위로 불이 꺼져요

 

미구에 나는 철 지난 감자로 뒹굴며

틔울 수 없는 싹을 무연히 밀어올리겠죠

바람 속에 말을 끌어안고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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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

** ‘벨라 타르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 2011>의 배경이 되는 곳

*** 바르도, 사유에서 생유로 이어지는 중간적 존재

 

 

 

 

화선지에 수묵화 정봉기

 

 

흰 종이는

먹의 농담과 물감의 채색으로

재탄생한다.

삶 또한 그리하리라.

한 번의 붓질이 남긴 흔적은 맑고 투명하다.

내가 걸어온 자취가,

내가 걸어갈 길이 단순했으면 좋겠다.

평범하게 머문 바람이

새싹을 키워내고 꽃씨를 옮기는 뒷모습.

머물던 자리 내어 주고

유유히 들길을 가듯,

지나온 자리로 해서 탁해지지 말자.

한 줌의 기억도 없는

무명한 빛깔이었음 좋겠다.

필 하나의 여백이었으면 한다.

 

 

 

 

벚나무 위인환

 

 

봄을 연모하여

시리도록 그리다가

백발이 된 노신사

 

옅은 바람에도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

 

어떤 가발을 쓸까

 

싱그러운 연둣빛 가발.

 

 

 

 

가시리오 - 박구미

 

 

가시리오

대문 활짝 열고 들어가셔서

이 방 저 방 둘러보시고

앞마당에 장독대랑 기염나무*도 쓰다듬어 보시고

뒷마당에 모란이랑 앵두나무에 싹이 튼 것도 보시고

버스 지나가는 신작로도 쳐다보시고

오랜만에 마을 회관에 가셔서

동네 어르신들과 인사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동산 모퉁이 가는 길 느티나무 아래 앉아서

동네 어귀도 바라보고

저 멀리 백운산이며 상연대**도 바라보시고

힘겹게 오르고 걷고 하셨던

세재 뜰이며 기염나무골 들녘이며 산도 둘러보시고

그렇게 그렇게 다 둘러보시고

평생토록 농사일이며, 자식들 걱정이며

자식들 줄 김장이며, 고추장이며, 청국장이며

이런 걱정들 하지 마시고

이제는 허리도 꼿꼿하게 펴시고

두 다리 아프지 마시고

예쁜 옷 입고 예쁜 신발 신고

잘 생긴 아버지한테 시집올 때처럼

곱디고운 얼굴로

마음 편안히 가시리오

그렇게 가시리오

 

* 기염나무 : 고욤나무의 방언

** 상연대 : 경남 함양 백운산에 있는 절

 

 

                                  * 월간 우리(20233월호, 통권 41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