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제주시 전농로 벚꽃 잔치

김창집 2023. 4. 5. 00:04

 

꽃피는 편지 - 김형술

 

 

제 노래를 받으시겠습니까

마른 바람 황사처럼 떠다니는 도시에서

봄이 와도 꽃피지 않는 우편함 한껏 열어

온몸으로 꽃피는 제 노래 꽃소식인 양

웃으며 받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경남 진해시 웅동1동 소사마을

예전엔 창원군 웅동면 소사리였던 진해 변두리

굼뜬 바다가 봄기운에 뒤척이기도 전에

번져나는 분홍빛으로 둘러싸이는 마을

진해 군항제 벚꽃 쯤 흰눈으로 흘겨보는

구름더미같은 벚꽃동산이 있지요

 

꼭 처녀 젖꼭지같다 어른들이 이야기 하던

아직 눈 못뜬 어린 꽃망울따라

신작로 가득 꼬리를 물던 뽀오얀 먼지 속

구경꾼 가득 실은 버스행렬이

산모퉁이를 돌아서기 시작하면

마을은 술렁였지요 육 이오 동란 때도

쥐죽은 듯했었다는 바다를 낀 산마을이

딸 단속 과부 단속 심란한 총각들 단속으로

때 아닌 전쟁 치른다 눈으로들 웃었지요

아홉내골(九川同) 푸르게 시린 계곡물을

대동아전쟁 군함용수로 쓰기 위하여

멀쩡한 산마을을 들판으로 끌어내리고

마을 사람 부역으로 일제 때 지어

웬만한 들판보다 너르다는 소사저수지

그 둑 아래 사방팔방 줄 맞추어 벚나무를 심어

단단히 얽힌 뿌리들 제방을 받치니

태풍과 홍수에도 아무 걱정없이

이 살만큼 깊고 너른 저수지를 꾸렸다지요

 

국민학교 사회시간에 배웠던대로

벚꽃은 일본의 국화라는데요

아버지 이마 가득 붉은 힘살 돋우시며

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그 할아버지 때도

이눔아 이곳은 벚꽃천지였다카이

대천지 원수같은 쪽바리 왜놈들이

이산 저산 기술자 데려 실하게 자란 벚나무들만

온갖 치성 캐어 옮겨 심고 가죽띠로 매질해도

동네 어른들 땀눈물로 키우고 자란 꽃나무라카이

왜놈들이 제아무리 지나라 꽃이라 우겨싸도

여기만한 벚꽃잔치 세상에 다시 없다고

대대로 귀로 듣고 보고 자랐다카이

 

낮술 없이도 불콰한 얼굴로 가슴 탕탕치시며

엽연초 불붙이시는 마을 어른들 어깨 너머

안개처럼 산을 타고 내리던 꽃기운 따라

구르듯 마을로 내려오던 장구, 꽹과리 소리

산 아래 키낮은 보리밭 이랑에서

자꾸만 호미를 놓치고 한눈 팔겆나

어깨 간절이는 노오란 햇살에

물오른 여린 보릿대만 헛꺾는 식구들에게

오늘은 그만 일어서자 아버지 말씀에

가물거리던 노래소절들 저절로

가슴에서 달려나오곤 했지요

 

깡보리 저녁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소리도 없이 누이들 꽃그늘로 흩어지면

어둔 골목길 휘파람 부는 총각들 머리 위로

희붉은 꽃빛으로 뜨는 봄저녁 달

마을 위 벚꽃동산 흰 차일마다 걸린 불빛이

딴세상 풍경처럼 아스름해질 때면

바람결에 흩어지는 풍물가락 짚어가며

내일 모레 벌어질 동네 꽃놀이를 위해

실겅에서 내려오던 풍물놀이 악기들

 

희무명으로 꼼꼼히 닦아 들기름으로 마름질하고

시누대 하는 가지채로 허공 두어 번 가누어 보며

꽹자 깽 꽹가리가 앞장서 나간 후에

두어 발짝 위에서 장구가 신명을 내면

북채를 힘껏 지켜들어라이

꽹과리 채 잡은 손에 사흘 굶은 듯 힘을 빼고

나비를 잡듯 손목은 부드러워야 한다이

작년 봄에 신명내다 징 깨먹은 징잡이를

올 봄에는 바꾸던지 술 감시를 잘 하던지

마을풍물대 맡았던 아버지 장구솜씨에

왜년 기생도 반해 종종 속곳자락을 적셨다지요

 

동네 해칫날* 뜬귀로 수업을 마치고

한걸음에 달려올라가던 꽃동산

지붕 가득 벚꽃잎을 덮어쓴 흰차일 아래

돼지고기 삶는 냄새 구수하게 피어오르고

국수며 삶은 계란이 소쿠리마다 담긴

나무그늘에 앉아 화전부치다 말고 돌아서서

제 아이 챙겨먹이는 어머니들 땀배인 이마 위에도

연분홍 꽃잎 한 두엇 웃음처럼 붙어 있고

막걸리잔에 떨어지는 꽃잎들을 후후 불던

꽃보다 붉은 얼굴에서 노랫가락이 새어나오면

올해에 제일 잘 핀 벚나무가로 둥글게

둥글게 둘러서서 봄놀이는 시작되었지요

 

동네 이장이 나와 한해농사를 기원하고

마을 안녕이며 건강이며 축원한 후

수염 허어연 마을 어른들게 차례대로 절을 올린 후

꽹과리소리 신호삼아 풍물놀이 꽃숲을 흔드는데

신명을 못이겨 펄쩍펄쩍 뛰는 양자어메나

수줍게 옷꼬리 잡고 어깨만 흔드는 양근이 아지매나

농사일에 검게 찌든 얼굴이며 목덜미 가득

화안하게 꽃기운 물들었지요

 

장고소리 징소리 통통거리는 소고소리 따라

동백기름 발라 쪽진머리에 벚꽃가지 꺾어 꽃고

날개같은 저고리자락 들어 하늘 가리키는

마디진 손끝들마다 꽃잎 아득히 휘날리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도는 춤행렬 슬쩍 빠져나와

구경하는 아들 딸들에게 막걸리 한사발 억지로 멕이며

등 떠밀어 춤판 한가운데로 끌어들이시던 아버지

붉어진 눈빛 슬몃 이런 말도 하는 듯 했지요

가난도 잘 색이면 괜찮은 거여

가난도 잘 색이면 괜찮은 거여

 

늘 그렇듯 신명 끈에 울음보를 터뜨리는

과수집 마산댁의 신세타령에 잔치는 끝나

뉘엿한 저녁해 따라 불타오르던 벚꽃동산

마을로 내려가는 신작로 꽃물든 듯 붉어

춤추며 가는 사람들 길고 긴 꽃행렬

아버지 장고소리 남도창소리 보리밭 따라

제 먼저 마을 내려가 저녁등을 켜면

그날 밤 꿈 속엔 온 마을이

꽃불에 휩사여 떠내려가곤 했지요

불 속에서 태어난 흰나비떼들이

산과 강물과 마을 하얗게 뒤덮어

새벽들일 나가자 아버지 깨울 때까지

곤한 잠 속에 붙은 불 꺼진 줄을 몰랐지요

 

제 편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봄이 와도 꽃피지 않는 도시 그늘마다 숨어

먼 꽃소식 낮꿈으로 꾸는 한낮으로

꽃노래를 들려주시겠습니까

핏줄 가득 주체할 수 없이 붉게 붉게 피어나는

꽃마을의 꿈들 가만히 집어

남몰래 우체통에 넣어주시 않겠습니까

경남 진해시 웅동1동 소사마을

공장이며 아파트며 빈틈없이 들어섰어도

손에 잡힐 듯 따뜻하게 살아 숨쉬는

용잠 참새미 듬방아들…… 그 살가운 지명들

아니 그보다 아득히 먼 어느 기억에서든지

슬픔처럼 숨은 그리움 그리움 가만가만 접어

제게 부쳐주시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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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칫날 : 잔칫날의 사투리.

 

 

                   *: 김형술 시집  의자, 벌레, (도서출판 전망, 1997)에서

                           *사진 : 제주시 전농로 벚꽃 축제장에서(2023.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