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거위와 오리가 노니는 못을 보며

김창집 2023. 5. 8. 01:00

 

 

2023415일 맑음

 

 

아르메니아에 입국하여 세반호수로 가는 길에

어느 전원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가 있어 나와 못가에 섰는데,

그 집에서 가꾼 정원 같은 100평 남짓의 연못에서

아름다운 백조들이 물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것을 보고

신기해 가까이 다가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다가가 바라보니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는 내 눈에는 거위와 오리로 보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 폰으로 몇 컷 눌렀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보다 소득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히 여유로워 보인다.

비행기에서도 공항에서도 거리에서조차

마스크 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우리보다 훨씬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을 보면서

물질적인 것을 너무 추구하는 것도

자꾸만 초조해 하는 것도 불행의 원인인 것 같아 부끄럽다.

 

 

 

 

퀸엘리자베스 공원 김윤자

     -캐나다 문학기행

 

 

밴쿠버 도심 아담한 언덕

산처럼 도타운 금잔디 동산에

하얀 망사실 꽃줄기가

경이로운 빛으로

아련한 회억의 영국 안개를 내품고 있다.

퀸엘리자베스 캐나다 방문은

돌가루만 휘날리던 황량한 채석장을

생명의 궁전으로 환생시키고

인공으로 가꾼 나무와 꽃물결

꿈길에서 조우하는 별빛 사랑이다.

상처로 움푹 패인 분지

너그러운 폭포가 선녀의 춤사위로 내려와

청옥으로 살찌는 연못이 되고

앙상한 뼈로 거칠게 솟은 잔등

밴쿠버 다운타운의 향기를

한눈에 담는 큰 눈, 고운 전망대다.

열려 있는 자유의 쉼터

다양한 인종의 야외 결혼식도 허락하고

거위 오리 다람쥐 스컹크가

사람처럼 걸음하며 행복을 노래한다.

 

 

 

 

거러기 - 정진명

 

 

전생에 나는 기러기였다.

쌀쌀한 밤하늘 높이 던져진 부메랑을 보면

냉전의 얼음벽에 갇힌 멸악산, 압록강을 넘어

빗살무늬와 청동의 차가운 꿈이 얼음장 밑에서 숨쉬는

툰드라의 대지까지 날아가고 싶었다.

그런 밤이면 내 꿈도 두개골 속의 남북항로를 따라

신의 눈동자 같은 바이칼 그 고요의 언저리까지 날아가곤 했다.

 

하지만 나는 거위였다.

지구의 절반 거리를 날던 위대한 날개의 기억을 잊고

마당에 던져진 잡다한 모이를 뿌리치지 못해

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꺼억 꺽 울부짖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도 낯가림은 여전하여

내키지 않는 자들을 만나면

아랫배에서 꺼억꺼억 거위 소리가 난다.

 

아직 지워지지 않은 부메랑의 기억이

어쩌다 한쪽 날개 밑에서 바람을 일으킨다.

그런 때면 책 속의 자기 항로를 따라

아득히 잊혀진 꿈의 날개를 퍼덕여보지만,

엉덩이는 현실 쪽으로 주걱턱처럼 빠져 뒤뚱거린다.

내 몸과 마음속에 벌써 40년이 넘게 사는,

기러기라고도 거위라고도 할 수 없는 이 묘한 짐승을

한 시골 중학교 학생들의 졸업논문집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담박에 알아보았다.

 

 

 

 

그림일기 - 정일근

 

 

맨 처음 도화지를 마주했을 때

나는 갈 수 없는 그 마을로 가기 위하여

높고 험한 산 사이로 숨은

작은 길을 그렸다

바람의 발길마저 끊어진 그 길에는

풀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진종일 꿈만 꾸고 있었다

 

나는 좀 더 빨리 그 곳으로 가기 위하여

당나귀 한 마리를 풀어주었다

당나귀는 제 그림자 속에

아이들의 동전 몇 닢 감추고

은은한 방울소리 울리며 뛰어갔다

 

-당신의 방울소리는 정말 아름답군요-

 

무지개 일곱 색깔 고운 아가미를 지닌 강물 속의 물고기와

숲 속의 푸른 나무들이 다가와 말을 건네자

수줍은 방울소리는

실낱같은 눈썹달로 떠올랐다

 

-어두운 밤 홀로 가는 당나귀는 외롭겠다-;

 

가만가만 산 한 채가 다가와 말했다

나는 피리를 불고 가는 사슴을

그려주었다 뒤뚱거리며

장난꾸러기 거위도 뒤따라갔다

 

어쩌면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신화 속의 나라를 생각했는지 몰라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동화의 마을을 꿈꾸었는지 몰라

 

하늘 한 귀퉁이에 별 하나를 그려놓자

풀꽃의 꿈속으로 별빛이 걸어 들어가

풀꽃의 꿈을 물고 가던 새의 부리가

금빛으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빛들은

내가 꿈꾸는 세상 더 밖으로 솟구치다

햇살의 미끄럼틀을 타고 그림 밖으로 달아나고

그 빛을 못내 추적하는 나의 시선이 끝나는 곳으로

마법 속에 갇혀있는

견고한 성 하나가 어렴풋이 빛났다

 

 

 

 

오리를 키운다 - 이향아

 

 

나 요즘 오리를 사육한다

낯선 거리에 뜨는 무지개를 찾아 나섰다가

우리는 서로의 창에 비친 청동의 하늘을 보았다

말하자면 눈이 맞은 것이다

탄천의 끝을 한없이 따라 걸으며 나는 어디서 돌아설까 망설였고

그들은 부리를 제 깃에 닦거나 목을 늘여

저녁 어스름을 마시면서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39번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갈 때도

지금은 주민센터로 변해버린 동사무소 다리를 막 지나면서

사람들을 제치고 창밖을 내다본다

나뭇잎들 떨어지고 가라앉은 개울 둔치 겨울은 아마빛

가슴은 그래도 살만한 세상 때문에 질정할 수가 없고

이제는 제법 숫자가 늘어난 거무스레한 내 오리들 무사하구나

순종하는 집새처럼 죽을힘을 다해 살고 있구나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지하도 층계를 헤엄쳐

오리처럼 나도 미끄러질 수 있을는지 몰라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물갈퀴를 있는 대로 펴서

숨을 참고 내려간다

저 시끄러운 진흙탕 시궁창

내 오리들의 뜨거운 깃털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