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시집 '물집'의 시(2)

김창집 2023. 6. 9. 00:07

 

 

분홍 넥타이

 

 

송악산 비탈, 한 뼘만 한 풀밭

나이 든 조랑말 한 마리

말뚝에 묶여 있다

발굽 아래가 바로 벼랑인데

캄캄한 낭떠러지인데

고삐에 매인 맴돌이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라는 듯

제자리를 맴돈다

이따금 고개 들어 바다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 숙이는,

한 뼘 원주에 묶인 내 몸도

많은 날 해 저물고 목이 마르다

그러니 생은

팽팽한 심줄 끌어당기는 풀밭

그 한가운데를 바라보는 것

 

올봄, 내 아이가 처음 맨

 

 

 

 

붉은 꽃으로 가다

 

 

저것들,

헤픈 듯한 웃음을 흘리며 길모퉁이에 서 있다

 

꽃잎 안을 살며시 들여다본다

반점 같은 씨방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벌거벗은 내가 잠들어 있는 자궁 속이

저리 푸르다

저렇게 푸르다

 

칸나에게로 가면

붉은 꽃잎으로 둘러싸인 생명을

볼 수 있다

까맣게 숨어 있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다

 

 

 

 

飛揚島(비양도)

    -

 

 

품은 것 없으니 날릴 것 또한 없다

 

비양오름은 사람의 주검조차 품지 못하고

묘비 하나 세우는 일 또한 없다

 

왜 비양도에선

소나무 억새 대나무 잎 끝이

파도에 관절 다 깎인 노파의 눈을 닮았을까

새벽부터 통통배 몰고 나간 아들과 며느리를 기다리며

생을 놓았다 끌어당기는 노파의 눈빛을 닮았을까

 

자 새겨진 컨테이너 박스 앞에

오도카니 나앉은 노파

촘촘한 주름살 사이로

바다의 골과 골을 들인다

 

절 마당에서 이제 막 꽃문을 닫는 붕선화가

노파의 손등에 화인으로 남는다

 

 

 

 

노을의 지층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걸어간

사내의 발자국

발자국 화석들은 모두 서쪽을 향해 있다

 

모슬포 해안과 이어진 사계리 바닷가

서쪽에는 모래무덤이 있고

모래무덤에 잠시 머물던 바람은

파도의 울음을 때려눕히며

벼랑을 타고 오른다

, 저것

일만 년 전 시간들이 겹을 이뤄 타오르는 노을

바람조차 붉게 물들이고 있다

 

몸 위에 몸을 겹쳐

들배지기 한판승을 거둔 파도가

발자국 위로 스며드는 저물녘

층층 겹겹

겹겹 층층을 이루는 것은

패총이라 불리는 조개껍데기만이 아니다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걸어간

사내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얹어

나는 노을의 다른 지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여전히 서쪽으로 향한 발자국

앞서 간 사내는 보이지 않고

발자국만 남긴 사내를 좇는 눈동자 속에도

일만 년 전 노을이 겹쳐지고 있다

 

 

 

 

곶자왈 괴석

 

 

  라운딩을 마치고 온 그가 아스피린을 찾는다

 

  골프장 진입로를 따라 기기묘묘한 괴석들이 진열되어 있더군 자잘한 돌무더기 위에 혹은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말야 원인 모를 두통은 그때부터 시작되더라구 티 위에 올려진 공을 날릴 때마다 헛손질이 계속되고 돼지 멱따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지 시펄, 끝내 18홀을 다 돌 수 없었어 수 만 년 생성의 어둠을 뒤로한 채 지상으로 끌려나와 상품이 되어버린 괴석들이 마치 조상들의 뼈처럼 보였어 두상을 타고 오르다 바짝 말라버린 으아리꽃 덩굴이 굳어버린 핏줄 같았어 피가 모두 빠져나간 모세혈관 말야 불현듯 묻혀 있을 때 빛을 발하는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일까, 내내 허방을 짚는 기분이었어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부챗살 같은 햇빛이 정수리 위에서 광광거리고

  서늘한 바람이 무중력의 뇌실腦室을 천천히 베며 지나갔다

  가만, 할아버지 언제 돌아가셨더라

  아버지는 또 언제……

 

 

                                   *정군칠 시집 물집(애지,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