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3)와 누리장나무 꽃

김창집 2023. 7. 30. 00:08

 

 

다시 집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금속성 경적이 사라지자 지하철이 바로 내 발 앞에서 멈춘다 사람들이 우르르 지하철 밖으로 터져 나오고, 그 숫자만큼의 사람들이 지하철 안으로 구겨진다 오후 세 시의 지하철 안은 조용하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습관적 피로가 묻어 있다 창 너머로는 허약하고 얕은 건물이, 술 권하는 광고의 남자 배우가 빠르게 지나간다 지하철이 터널로 들어설 때는 먼지를 뒤집어쓴 천장의 전등들이 짓누르는 어둠에 일제히 저항한다

   어떤 사람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책을 가방 속으로 밀어넣는다 아무도 무엇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디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하철 안의 둥글게 휘어 있는 벽면 틈으로 종착점임을 알리는 여자 아나운서의 음성이 새어 나온다 사람들은 모두 종착역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준비에 마음이 바쁘다

 

 

 

 

오름을 오르내리며

 

 

비 갠 오후에 오름을 올랐다

빗방울 품은 잡초가 무성했다

오르는 일이 항상 어려운 것은

꼭 중력 때문은 아닐 터였다

 

오름 중간쯤에서 간단한 운동기구

몇 개 널려 있는 쉼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에 쌓인 한을 깨끗이 풀 듯

한 청년이 두 손으로 철봉을 잡고

짧은 다리를 맹렬히 흔들고 있었다

 

옛날이 내게는, 나무와 대화하며

운동에 전념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

 

오름 정상에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굵은 비가 금방 쏟아질 것 같았고

내려올 때의 하늘은 더 흐렸다

 

일상의 가파른 오름도 탈 없이

오르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헛되고 터무니없는 자만이었다

 

이제, 오름을 오르내리는 일은

불안정한 공중비행과 다르지 않았다

 

 

 

 

관습이라는 굴레

 

 

보통 이상으로 마음이 편안하고

 

축복의 휘장이 맴도는 듯한

 

우리 삶의 이 넓은 공간에

 

다시는 이동하지 않을 태세로

 

옛날부터 자리를 잡았다

 

오랜 관습의 엄청난 무게로

 

머리끝이 옥죄일 때마다 우리는

 

수긍하는 척하면서 생각을 바꾼다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막대자석 같은 생활 속에 숨어 있다

 

두툼하고 완고한 모습이다

 

어느 개인의 창작품은 아니다

 

길고 긴 시간의 그것을 만들었다

 

 

 

 

안구건조증

 

 

  안구건조증이 생기면서 사물이 겉이 흐리게 보였다 나는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런 내게 예상치도 못한 놀라운 일이 생겼다 사물의 겉이 여전히 흐리게 보이는 대신 사물의 속은 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사물의 속도 겉처럼 흐리게 보였다 하지만 시감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사물이 속이 잘 보이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인내하는 과정을 거쳐야 마침내 산의 정상에 도달한다는 등산의 이치와 비슷했다

  양쪽을 두루 알고 있는 내가 보건대. 사물의 겉과 속은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범박하게 말하면, 흐리게 보이는 사물의 겉은 거짓을, 잘 보이는 사물의 속은 진실을 각각 숨기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을 커다란 행운으로 여긴다 그리고 앞으로는 사물의 속을 잘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잘 해석할 수 있게 되기를 열렬히 소망한다      그것은 요즈음의 내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능력이므로

 

 

 

 

새 안경을 쓰면서부터

 

 

고급 안경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새로 장만한 안경을 쓰면서부터

쓸데없는 사물들이 가끔 보였다

 

안개 낀 해변을 걷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새 안경 앞에 멈추었고

 

터키의 어느 화산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연기가 새 안경 앞에 어른거렸다

 

길에서 만난 사람을 그냥 보내지 못해

어려운 대면을 끝내고 헤어질 땐

공중을 느리게 배회하던 생각들이

새 안경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다

 

세상을 다 투과하지 못한 렌즈의 불안이

새 안경 구석에 까만 점으로 모였다가

깊은 밤엔 침실의 천장을 빙빙 돌았다

 

희미했던 내 시력이 더 희미해진 것도

새 안경을 쓰면서부터 생긴 변화였다

 

물론 새 안경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모두 새 안경을 쓴 내게 있음이 분명했다

 

 

*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황금알, 2023)에서

* 사진 : 요즘 막 피기 시작한 누리장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