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2023/03 31

추억의 황매산 철쭉

♧ 철쭉꽃 - 양전형 다 펼친 게 아름다운가 다 숨긴 게 아름다운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거침없이 속 다 꺼낸 너를 용서한다 붉은 고백 하나로도 너는 죄를 다 씻었다 네 붉은 입술에 하늘이 내려앉아 묵묵히 불타고 있구나 아, 너의 뜨거움을 바라봄으로 너의 소갈머리 닮은 꽃눈이 지금 북풍설한의 빙점 똟고 돋아난 내 안의 꽃눈들이 지금, 아아 나는 몰라요 그대여! 나 지금 철쭉이어요 피고 싶어요 *사진 : 2016년 4월 30일 황매산과 비슬산 산행에서

아름다운 세상 2023.03.31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7)

♧ 진흙 연습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의 영혼과도 마주치지 않으며 내 안에 진흙 뼈와 진흙 감정이 고여 있지 않으며 진흙은 사람을 쉽게 버리며 진흙은 찰지고 고요하고 아름답지 않으며 비를 맞으면 내 몸에서 무너진 풍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으며 나는 진흙 입술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로 노래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은 배반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진흙의 두 손을 버리지 않았으며 진흙 피가 쏟아지지 않았으며 진흙 심장이 금이 가지 않았으며 내 눈에서 짐승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며 진흙 입술은 칼로 손목을 그은 자처럼 두 팔의 영혼이 되지 않으며 사막이 지나가지 않고 불타는 밤이 만져지지 않고 진흙이 진흙을 끌고 오지 않고 다 읽을 수 없는 진흙 얼굴은 ♧ 새라는 통증 새는 내 눈에만 보이는 통증 누가 죽은 ..

문학의 향기 2023.03.30

오승철 시조집 '다 떠난 바다에 경례'의 시조(4)

♧ 발자국의 시 지우려면 싹 지우고 그냥 돌아갈 일이지 산방산과 해안변에 발자국으로 써 놓은 시 파도와 비바람마저 씻지 못한 저 발자국들 ♧ 남극노인성 우러러 우러르라 장수의 별 뜨는 마을 서울, 평양, 제주시 그 어디도 안중에 없고 서귀포 그리움의 땅 칠십리로 오시는 별 한여름 밤 지배하던 전갈자리 떠난 하늘 불배들 간절한 꿈 하늘 닿아 타오르는 호박꽃 다 졌는데도 반딧불처럼 떠도는 별 아버지 저 바다에서 무슨 꿈 그리는가 할망당에 두 손 모으듯 그 무엇을 빌고 있나 우러러 우러르시라 별의 마을 서귀포 ♧ 밥 한술만 내밀어도 뫼비우스 띠처럼 온종일 눈 오는 날 점심상 받아놓고 밥 한술만 내밀어도 4․3땅 쇠테우리로 펏들펏들 떠도는 눈 ♧ 슬픔으로 먹는다. 꿩 오늘은 얼마 벌었노? 이 산 저 산 곡쟁이야..

문학의 향기 2023.03.29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5)

♧ 빛나는 – 권순자 추위가 바람결에 출렁거렸어 빛이 부서져서 어두운 방향으로 녹아들고 소리들이 굴렀어 느티나무 잎은 말라서 낯선 기억처럼 떠돌았어 깨어져 버려서 허물어져 버려서 떠도는 몸이 유리 조각처럼 빛났어 아직은 살아있어 누군가가 속삭였어 찌그락 째그락 소리를 내는 부서진 몸이 무서웠어 뾰족하게 살아서 뾰족하게 빛나는 입을 다물지 않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깨지면서 더 맑은 소리로 공기를 갈라서 시원했어. 죽는 건 살점이 아니고 사는 건 어둠이 아니고 빛나는 소리였어 ♧ 생의 등선 – 이상호 무심코 뱉은 말이 빈집처럼 허허로워 물수제비뜨던 날은 어둠 속에서 꽃 피었다. 해질녘 뒷모습들이 어둑어둑 가라앉고 물 위로 흐르는 것 어둠만이 아니어서 몸 누일 안식처를 잃어버린 철새들이 밤마다 소금별처럼 반짝..

문학의 향기 2023.03.28

계간 '산림문학' 봄호의 시(2)

♧ 이른 봄에 피는 꽃은 – 강영순 이른 봄 살을 에는 바람 눈물 머금고 입술 앙다물고 꿈결같이 피어나는 저 꽃은 기특하다 할까 애처롭다 할까 밝고 맑은 영혼 구름 없는 하늘 꽃잎에 어리고 얼음장 밑 개울물 소리 내어 흐르는데 꽃 피우는 마음 꽃 보는 눈길 세상은 다시 환해져 새봄 길을 재촉하네 ♧ 뚝배기 받침대 – 국중홍 몸을 사를 듯한 뜨거움 받아 안고 시퍼렇게 섰던 날은 시나브로 까맣게 타버렸다 촘촘히 엮은 왕골 검은 화상 속에 비친 당신의 어깻등 뭉그러져, 더는 태운 것도 없다 여섯 숟가락 들락거리는 끓은 뚝배기 아래 아버지 몸이 타들고 있었다 ♧ 세설원에서 – 권달웅 귀양 가듯 한여름 담양에 갇혔네. 뒷산 금강송 숲에 내리는 비가 한 사흘 아무것도 듣지 않은 내 귀를 적시네. 간밤에 불어났던 계..

문학의 향기 2023.03.27

네덜란드 쾨겐호프 튤립 축제

♧ 튤립 꽃 시장 - 김윤자 -네덜란드 문학기행 꽃만 보시면 안 됩니다. 가슴으로 읽어야 합니다. 빨강, 노랑, 주황, 파랑 보라, 하양, 천상의 꽃물결이 이성을 밀어내고, 감성을 적시어도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차가운 터에서, 차가운 손으로 일구어낸 목숨의 꽃, 나라의 꽃이라는 사실을 백이십 개국에 수출하는 광활한 노점 화훼단지 큐켄호프 꽃 정원 전망대에서, 대로변에서 본 꽃밭은 꽃을 떠난 경이로움, 소슬한 비경입니다. 바다의 짠물을 딛고 서걱이는 모래를 헤집고 일어선 풍요 보석이 구르는 들녘입니다. 잘 생긴 튤립 꽃, 하나 만나거든 꽃만 보지 마시어요, 시린 땅에서 온 생명입니다. 색상이 아름답다 하기 전에 피와 땀으로 물들인 네덜란드 국민의 눈물겨운 손길을 먼저 그리셔야 합니다. *사..

아름다운 세상 2023.03.26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6)

♧ 새벽 4시까지 나는 갈비뼈가 아프면 자랑스러워 혀를 깨물면 열쇠가 들어있어 먼지란 발음이 가장 아름다웠어 심야의 편의점에서 만난 여자애가 말할 때마다 담배 냄새가 났어 적은 용서받기 위해 태어나고 삶이 그대를 속인다면 속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고체들은 외롭지 목포에서 한 달만 살까 대학 동창들은 부지런하고 책을 들고 다니면 난 무언가 될 수 있을까 앞머리를 길게 기를 거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아 새벽 4시까지 나는 비물질이야 우리는 다시 발생할 거야 ♧ 궁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국민교육헌장을 외던 국민학교는 국민만 남아 있었다 개근상을 받기 위하여 국민이..

문학의 향기 2023.03.25

오승철 시조집 '다 떠난 바다에 경례'의 시조(3)

♧ 사천 년 해녀물질 끝나는 바다에서 한반도 해안선 따라 굽이굽이 돌아들면 어디서나 고무옷 입고 늙어버린 바다가 있다 이어도 꿈을 그리며 건너온 저 바다들 삼짇날 원정물질 추석이면 돌아간다 다 떠난 바다에도 물결소리 숨비소리 더러는 육지총각과 눈이 맞아 눌러산다 사천 년 대 이은 물질 이제 비록 끊긴대도 사람 서넛 사는 섬에 데닥데닥 홍합처럼 사투리 제주사투리 끈질기게 붙어산다 ♧ 모슬포 절울이오름 절울이 외로운 날은 사람들도 외롭다 한반도의 끝자리 바람받이 총알받이 가파도 마라도마저 선명하게 뜨는 날 아무렴 왜 안 그러랴 이 몹쓸 모슬포 세월 신축교란 백조일손 그런 말만 들어도 부르고 싶은 이름들 떠돌지 아니할까 그래 안 부르마 다시는 안 부르마 오름 끝 벼랑 끝을 후벼 파는 파도 소리 아무리 잔잔한 ..

문학의 향기 2023.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