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1625

제주 4.3 75주년 추념식과 시화전

♧ 아무도 아닌 자*의 섬 – 원양희 당신은 어느 해변에서 어느 계곡에서 어느 바위굴에서 어느 오름에서 모래가 되었나요 바람이 되었나요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서 핏방울로 살점으로 흩어져 갔나요 뜨거운 각막의 고통, 기억의 세포마다 대못이 박혔나요 천 조각 만 조각 갈라진 가슴 부여잡고 비명조차 삼킨 채 숨죽여야 했나요 추위보다 배고픔보다 더 혹독한 건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막막함이었나요 생명이 생명이지 못했던 폭력 앞에 광기 앞에 푸른 하늘 푸른 바다만 서럽게 서럽게 바라보았나요 아직 섬을 떠나지 못한 당신 영혼은 긴 침묵의 시간 건너 겹동백 붉은 꽃잎으로 피었나요 생채기 선명한 잎사귀가 되었나요 보랏빛 순비기꽃으로 피었나요 하얀 나비로 날아올랐나요 --- *파울 첼란의 시 『찬미가』중. ♧ 열 ..

문학의 향기 2023.04.03

오승철 시조집 '다 떠난 바다에 경례'의 시조(5)

♧ 우성강을 건너다 바다에도 강이 있다 힘줄 같은 강이 있다 우도와 성산 사이 ‘우성강牛城江’ 건너러면 갈매기 네댓 날리며 과자 뇌물도 바친다 시인 강중훈 고향 오조리도 흘려보내고 내 누이 시집 살던 종달리도 흘려보내고 보내고 남은 사람만 그 죗값이 푸르다 천진항 뱃고동 소리 마지막 울고 나면 어느 집 올레인들 이별 없이 버텼을까 물 천장 막 깨고 나온 숨비소리 저 갯메꽃 ♧ 저 말이 가자 하네 사진작가 권기갑의 말 한 마리 들여놨네 고독은 고독으로 제련하란 것인지 삼백 평 눈밭도 함께 덤으로 사들였네 십년 넘게 거실 한켠 방목 중인 그 말이 불현듯 투레질하네 이 섬을 뜨자 하네 나처럼 유목의 피가 너에게도 흐르느냐 살아야 당도하는 사나흘 뱃길인데 해남인지 강진인지 기어이 가자 하네 고향도 하룻밤 잠시 ..

문학의 향기 2023.04.02

계간 '산림문학' 2023년 봄호의 시(3)

♧ 봄의 소리 – 석연화 그대여 목소리를 낮추어 주십시오 속삭여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재잘거리는 새들의 소리가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뺨을 더듬는 바람소리가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주십시오 수줍게 터뜨리는 꽃망울의 신임소리가 있습니다 그대여 시인의 마음이 되어 주십시오 이 기막힌 윤회의 소리가 당신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 봄꽃의 첨병 – 성명순 뒤에 서 본 적이 없다 눈보라 온몸으로 헤치며 걸어온 언덕에 비로소 벙근 매화 나를 보고 모두 저마다 꿈을 보이라고 당당히 외친다 ♧ 아주 짧은 소설처럼 – 손현숙 통유리 창가에 하품으로 앉아서 아슴아슴 햇살을 읽네 화장도 하지 않은, 매캐한 암향이 하늘 문을 연다 구름 속에 구덩이를 파고 푸른 질의 여자가 발목을 내린다 남쪽..

문학의 향기 2023.04.01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7)

♧ 진흙 연습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의 영혼과도 마주치지 않으며 내 안에 진흙 뼈와 진흙 감정이 고여 있지 않으며 진흙은 사람을 쉽게 버리며 진흙은 찰지고 고요하고 아름답지 않으며 비를 맞으면 내 몸에서 무너진 풍경이 다시 무너지지 않으며 나는 진흙 입술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로 노래하지 않았으므로 진흙 입술은 배반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진흙의 두 손을 버리지 않았으며 진흙 피가 쏟아지지 않았으며 진흙 심장이 금이 가지 않았으며 내 눈에서 짐승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며 진흙 입술은 칼로 손목을 그은 자처럼 두 팔의 영혼이 되지 않으며 사막이 지나가지 않고 불타는 밤이 만져지지 않고 진흙이 진흙을 끌고 오지 않고 다 읽을 수 없는 진흙 얼굴은 ♧ 새라는 통증 새는 내 눈에만 보이는 통증 누가 죽은 ..

문학의 향기 2023.03.30

오승철 시조집 '다 떠난 바다에 경례'의 시조(4)

♧ 발자국의 시 지우려면 싹 지우고 그냥 돌아갈 일이지 산방산과 해안변에 발자국으로 써 놓은 시 파도와 비바람마저 씻지 못한 저 발자국들 ♧ 남극노인성 우러러 우러르라 장수의 별 뜨는 마을 서울, 평양, 제주시 그 어디도 안중에 없고 서귀포 그리움의 땅 칠십리로 오시는 별 한여름 밤 지배하던 전갈자리 떠난 하늘 불배들 간절한 꿈 하늘 닿아 타오르는 호박꽃 다 졌는데도 반딧불처럼 떠도는 별 아버지 저 바다에서 무슨 꿈 그리는가 할망당에 두 손 모으듯 그 무엇을 빌고 있나 우러러 우러르시라 별의 마을 서귀포 ♧ 밥 한술만 내밀어도 뫼비우스 띠처럼 온종일 눈 오는 날 점심상 받아놓고 밥 한술만 내밀어도 4․3땅 쇠테우리로 펏들펏들 떠도는 눈 ♧ 슬픔으로 먹는다. 꿩 오늘은 얼마 벌었노? 이 산 저 산 곡쟁이야..

문학의 향기 2023.03.29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5)

♧ 빛나는 – 권순자 추위가 바람결에 출렁거렸어 빛이 부서져서 어두운 방향으로 녹아들고 소리들이 굴렀어 느티나무 잎은 말라서 낯선 기억처럼 떠돌았어 깨어져 버려서 허물어져 버려서 떠도는 몸이 유리 조각처럼 빛났어 아직은 살아있어 누군가가 속삭였어 찌그락 째그락 소리를 내는 부서진 몸이 무서웠어 뾰족하게 살아서 뾰족하게 빛나는 입을 다물지 않는 소리는 멈추지 않고 깨지면서 더 맑은 소리로 공기를 갈라서 시원했어. 죽는 건 살점이 아니고 사는 건 어둠이 아니고 빛나는 소리였어 ♧ 생의 등선 – 이상호 무심코 뱉은 말이 빈집처럼 허허로워 물수제비뜨던 날은 어둠 속에서 꽃 피었다. 해질녘 뒷모습들이 어둑어둑 가라앉고 물 위로 흐르는 것 어둠만이 아니어서 몸 누일 안식처를 잃어버린 철새들이 밤마다 소금별처럼 반짝..

문학의 향기 2023.03.28

계간 '산림문학' 봄호의 시(2)

♧ 이른 봄에 피는 꽃은 – 강영순 이른 봄 살을 에는 바람 눈물 머금고 입술 앙다물고 꿈결같이 피어나는 저 꽃은 기특하다 할까 애처롭다 할까 밝고 맑은 영혼 구름 없는 하늘 꽃잎에 어리고 얼음장 밑 개울물 소리 내어 흐르는데 꽃 피우는 마음 꽃 보는 눈길 세상은 다시 환해져 새봄 길을 재촉하네 ♧ 뚝배기 받침대 – 국중홍 몸을 사를 듯한 뜨거움 받아 안고 시퍼렇게 섰던 날은 시나브로 까맣게 타버렸다 촘촘히 엮은 왕골 검은 화상 속에 비친 당신의 어깻등 뭉그러져, 더는 태운 것도 없다 여섯 숟가락 들락거리는 끓은 뚝배기 아래 아버지 몸이 타들고 있었다 ♧ 세설원에서 – 권달웅 귀양 가듯 한여름 담양에 갇혔네. 뒷산 금강송 숲에 내리는 비가 한 사흘 아무것도 듣지 않은 내 귀를 적시네. 간밤에 불어났던 계..

문학의 향기 2023.03.27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6)

♧ 새벽 4시까지 나는 갈비뼈가 아프면 자랑스러워 혀를 깨물면 열쇠가 들어있어 먼지란 발음이 가장 아름다웠어 심야의 편의점에서 만난 여자애가 말할 때마다 담배 냄새가 났어 적은 용서받기 위해 태어나고 삶이 그대를 속인다면 속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고체들은 외롭지 목포에서 한 달만 살까 대학 동창들은 부지런하고 책을 들고 다니면 난 무언가 될 수 있을까 앞머리를 길게 기를 거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아 새벽 4시까지 나는 비물질이야 우리는 다시 발생할 거야 ♧ 궁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국민교육헌장을 외던 국민학교는 국민만 남아 있었다 개근상을 받기 위하여 국민이..

문학의 향기 2023.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