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1625

계간 '제주문학' 2023호 봄호의 시조(3)

♧ 김유정역을 지나며 - 김영란 수줍은 사랑고백처럼 생강나무 꽃 피어요 옴팍한 떡시루 같은 봄·봄 실레마을 야윈 목 앓는 소리로 노란 꽃이 피었어요 청량리 경춘선 타고 배웅하는 봄바람 그토록 살고 싶던 스물아홉 생의 벼랑 유정도 유정하여서 역으로 남았을까요 받지 못한 답장처럼 삼월에 눈 내려요 점순이 고 가시내는 닭갈비를 판다네요 그대는 마지막 편지 누구에게 쓸 건가요 ♧ 움파야 – 김영숙 -자살미수사건 판결문을 보고 들려줘 남은 너의 이야기 우린 그게 궁금해 속대 노란 오늘은 많이 아플지 몰라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네가 쓸 페이지를 ♧ 하류 예감 - 김정숙 갱년기가 사춘기보다 몇 배 더 무섭다며 몰아치고 휩쓸리며 혼미한 정신 들쑤실 때 누가 나 정리 좀 해줘요 끝도 없는 NO년기 ♧ 봄의 설계도 - 김..

문학의 향기 2023.05.15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5)

♧ 단풍나무 유월의 녹음 속에서 붉게 타오르다 기다림으로 서 있는 사람 햇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만첩빈도리 꽃 달콤한 향기에 취해 기다림으로 붉게 서 있는 사람 ♧ 종소리 구월 볕이 쟁쟁거리던 날 증명사진 찍으러 사진관에 갔다 30분 후 나온다 하여 시장을 기웃거리다 국수 한 그릇 먹었다 성당 앞을 지나는데 이명 같은 종소리 들린다 열두 시를 알리고 있다 밀레의 만종 화폭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묵도의 시간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온 애수에 젖은 종소리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총총히 사라져 여운 속으로 걸어간다 ♧ 참회의 시간 물빛 사이로 해초들이 아롱거리는 이른 아침 게 한 마리 갯가에 나와 귀여운 아기 고양이 같이 앙증맞은 세수를 한다 물결이 그림자 같이 다가..

문학의 향기 2023.05.14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의 시(1)

♧ 시인의 말 귀울림이 심한 날 용수리를 발음해본다 부딪히는 어머니 말, 자나미로 밀려오면 곱숨비질 건너에서 호오이 소리가 매조제기에 떠돈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바다 너머 풍경은 그렇게 모두 되돌아온다 어두운 생(生) 환히 밝힌 어머니를 통해서… 2023년 5월 김신자 ♧ 풀바른 구덕* 일생이 마디라서 부러질 줄 몰랐네 빳빳이 풀 먹이고 단정히 펴 바르면 두어 평 남루한 마루 알록달록 환했네 천조각 뜯어내어 상처들 덮은 무늬 상웨떡 담긴 모습이 꿈처럼 번지는 건 자식들 뒷바라지한 어머니 흔적이네 몇 번을 덧바르면 가난도 말라붙고 쥐오줌빛 얼룩들이 서성대다 멈출 때 무뚱에 졸음 한 짐을 들고 오던 겨울 햇살 --- * 풀바른 구덕 : 대바구니가 헐어서 종이나 ..

문학의 향기 2023.05.12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1)

♧ 바람꽃 - 임미리 천지에 바람 소리 가득한 날 꽃잎, 소식 한 줄 전하네요. 바람 불어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부드러운 꽃잎 사이로 한 움큼의 향기 붉어져 그대에게 살며시 스며드네요. 나를 바람꽃이라 불러주세요. 세월 흘러도 잊지 않을 향기처럼 꽃의 화신으로 남을게요. 그대에게 영원히 머물 수 있기를 세상에 흔들려 형체를 잃어버려도 온몸으로 그대 감싸 안으며 천년인 듯 향기롭게 피어나기를 바람이 불러주는 노랫소리 천지가 온통 바람꽃이네요. ♧ 인디언 질경이 – 장문석 질기고 독하다는 말, 빈말이라도 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우리 땅 빼앗았잖아요 짓밟고 또 짓밟았잖아요 수수만년 사원이자 신전이었던 숲, 그 영험에 불을 지르고 사냥하듯 총질까지 했잖아요 숲의 정령들이 구천을 떠돌고 별들의 춤사위가 고꾸라졌어요 ..

문학의 향기 2023.05.11

계간 '제주작가' 2023 봄호의 시조(2)

♧ 열 밤 자민 - 이애자 아이는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고 어머닌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고 제삿날 세고 샌 날도 희끗희끗 새어서 한 다리 건너 열에 아홉이 사삼유가족이라 고조모 총살에 가고 고모할망 행방불명이라 깊게 팬 슬픔조차도 허락지 않던 사월이라 오메기술 ᄒᆞᆫ 잔 두 잔 술기운이 오르면 제삿날마다 괜히 긁어대던 오촌당숙이 그토록 깽판을 놓고 풀어야 했던 응어리라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제사에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사에 성할망 혼절하고야 끝을 보는 제사에 애기고사리 열 밤 스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할미꽃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삿날 동동 기다려 열손가락 꼽는 봄 ♧ 한라산의 겨울 – 장영춘 추울수록 뜨거워지는 ..

문학의 향기 2023.05.10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4)

♧ 위로 대문을 나서는데 반짝 눈길을 붙잡는다 흙이라곤 한 줌도 보이지 않는 시멘트와 시멘트 사이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을까 민들레 한 송이 빙그레 웃고 있다 흙 한 줌 없는 그곳 그 좁은 사이를 ♧ 감사한 하루 비행장 철조망 따라 철길 같은 데크길 걷는다 망루 바라보며 살랑대는 들꽃들과 눈인사하며 실루엣 같은 바람 슬며시 스쳐 지나가는 길에 포로롱 참새 한 마리 철조망 사이를 날아간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연들 구름 따라 흩어지는 시간 큰 바위 얼굴 같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절로 감사하고 싶은 하루가 지나간다 ♧ 노란 엽서 도서관 창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밤새 도착한 노란 엽서들 어디서 날아온 사연들인지 눈이 부시다 오가는 사람 뜸해 아직 배..

문학의 향기 2023.05.09

계간 '제주작가' 2023년 봄호의 시조(1)

♧ 목련의 잠 – 김영란 시작은 그리 아름답지 않아도 좋아 상처의 역설은 향기가 난다는 것 기막힌 반전이라도 저녁은 빛났잖아 끝난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노래처럼 길은 또 시작되고 울음소리 부푼다 간신히 다독인 슬픔 붉은 꿈을 품은 거야 ♧ 툰드라 - 김영숙 저어기 돌담 위에 새순 돋아도 툰드라 김 시인 배롱나무꽃 바알가니 피는데 송령골 비크레기엔 아직도 툰드라 툰드라 ♧ 금뱃지 - 김정숙 매일 새 일하고 새 밥 먹고 새 집 살고 새 날을 살게 새 소리 하는 거라고 구구구 짹짹짹 까옥 그 소리가 그 말인가 ♧ 밀양이라 부르면 - 김진숙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밀양이라 부르면 쇠사슬 칭칭 감은 할매들 마지막 일침 “산에도 주인이 있다 나를 밟고 가거라” 밤늦게 도착한 단장면 사연리는 산이 산을 업어주고 달빛..

문학의 향기 2023.05.07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3)

♧ 빈집 어느 날부터 사람 사는 냄새가 사라져 빈집은 점점 허약해지고 적막강산 저체온증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빈집이 폐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얼마 만인가 집을 떠나 유배 생활을 한 지가 병원 생활을 뒤로하고 잠깐 귀가했다 음식 냄새가 나고 말소리가 들리고 발소리 잦아져 싸늘하게 쓰러져가던 빈집에 생기가 돌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 고장 난 로봇 그는 점점 앵무새를 기르고 싶어 해요 오늘의 평화를 위하여 주인이 원하는 말만 해야 하는데 앵무새는 자꾸 헛소리만 해요 그는 점점 애완견을 기르고 싶어 해요 주인이 돌아오면 달려 나가 겅중겅중 꼬리를 흔드는 복사꽃이 화사하게 피어오르다가도 금세 살얼음판 아무리 조심조심 발을 옮겨도 삐거덕 삐거덕 자세히 바라보면 서로 닮은꼴이면서도 바라보는 곳이 달라 ..

문학의 향기 2023.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