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시집 '시골시인 - J'의 시(4)

김창집 2022. 6. 27. 01:16

 

요양원 - 허유미

 

남은 이빨 여섯 개쯤의

규칙적인 동사로만 누워 있을 때

기린은 우기 속으로 들어간다

매일 되짚어야 하는 게 지루한 고민이어서

얼룩무늬를 쑤욱 당겨 보거나 긴 혀로 시계를 핥는 건

기린의 늘어진 고독

홀로 먼 곳을 볼 수 있는 건 구원일까

우기의 밤마다 창문을 열어 두었다

맹렬한 빗줄기에 아카시아 잎과 포도 넝쿨은

내일의 패턴을 생각하며 부피가 커지고

초원의 들판은 태엽을 감은 듯 짙어지는데

기린은 궁금한 것이 사라질 때마다

등뼈가 좁아졌다

목표도 절망도 건조한 시간

사소한 끼니와 사소한 안부를 독송처럼 되새김질하며

다음 생의 믿음만큼 목만 늘린다

몸을 다 빠져나가지 못한 야생의 울음이

무리 지어 우기의 밤을 활주하지만

차트에는 남겨지지 않으므로

기린은 기린을 배제하고 세밑을 앓다

긴 다리가 부러지듯 이빨이 뽑힌다

풀어놓아도 달아날 줄 모르게

 

 

 

조로아스터교식 화장 - 고주희

 

엄마, 나 사람을 죽였어- 로 시작하는 노래를

도서관에서 들었지요 해질녘 아마도 중간고사 벼락치기

누가 내 사물함에 죽은 토끼를 넣었어요

 

사는 동안은 침범 없는 혼자였는데

사후엔 가죽바지 하나 지키지 못했어요

 

비건의 혀에선 마른 풀꽃향이 나는데

시인의 혀에선 무슨 향이 날까요

죽은 가수의 노래는 죽은 가수만 빼고 부르는데

누가 내 사물함에 죽은 토끼를 넣었어요

 

마이크가 필요했던 걸까요

딸기꽃 하얗게 진 자리에 온통

새빨간 당신이 들어앉아서

 

식료품 가게의 가지런한 케첩들처럼

앙코르를 청하고 있네요

 

접시에 놓인 수플레

말캉한 봄이 제멋대로 굴러다녀요.

 

타로를 보고 점사를 보고 종일

운명을 점치고 다녀도

발에 채는 재수 없음 혹은 재주 없음

 

고음불가 구역에서 고음을 내지 말아요

자비의 여신은 오늘 밤 집에 안 들어와 블라블라*

 

시작되자마자 망하는 생이 있다면

우선 토끼에게 사과해요.

울게 해서 미안해, 라고 울면서 얘기해요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하는 밤

세상의 온갖 뜨거운 결말이 하나로

 

지금 막,

조로아스터교식 복수가 시작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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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cen)<Radio Ga Ga>.

 

 

 

요단강 언저리 키친 - 김애리샤

 

어정쩡한 발바닥에

낡아 버린 기도들을 듬뿍 뿌려 넣고

달달달 볶아요

거기에 감초는 역시 종려나무 이파리죠

종려나무 이파리를 툭툭 썰어 넣고

잔말 말고 다시 볶아요

아흠아흠 주책없이 하품이 나오려 할 때

우물쭈물은 필요 없어요 그냥

요한복음 316절이나 가지고 와요 빨리, 그리고

원하는 걸 넣어요 방언과 함께

상관없어요 스릉스릉한 곁눈질은

숨 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니까

냉동실에 꽁꽁 얼려 놓았던

소망 덩어리들을 큰소리로 해동시켜요

한번 풀어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한 가지씩만 해동시키길 권장해요

그래야 제대로 된 하늘색 램프가 켜지거든요

그래야 당신 눈동자가 구원처럼 춤출 수 있거든요

그래야 당신 영혼도 받을 뗄 수 있거든요

우리는 소망과 맞바꿀 의무를 다할 준비가

되어 있잖아요, 한 발짝

그걸 잘 다져 넣으면 되요

소망의 맛이 훨씬 풍만해질 거예요

뭐니뭐니 해도 가슴속 깊이 박혀 있는

화력 조절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요단강 언저리에서 소망을 요리해 봐요

그러나 참고하세요

소망은 간절할수록 사소한 맛이란 걸요

신중할수록 어수선한 당신을 듬뿍 넣어야 하는 전제예요

그러니 우리 식상한 회개 따윈

양념으로 쓰지 말기로 해요

요단강 저쪽으로 째깍째깍 걸어가고 있는 당신이

최고의 레시피이니까요

 

 

 

문어 - 김효선

 

흰옷에 적당히 튀는 걸 즐기는 달빛이다

 

아무튼 질문만 던지는 여덟 개의 다리가

지리멸렬한 문장 하나 쑥 빼 가더니

문어의 심장은 세 개

 

머리카락 한 올 얼굴에 달라붙어

온몸의 지축이 흔들리며 심장이 요동칠 때

 

물을 움켜쥔

두 번째 심장이 절망과 뒤엉켜

거대한 축문祝文의 몸뚱어리가 탄생한다

 

생리처럼 번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면

여기는 오다는 끊겨 버린 미래 같아서

 

때로 신념은

너무 꽉 쥔 나머지 물컹한 어둠에 넘어지고

잘라낼수록 더 단단하게 자라는 슬픔

물은 어디까지 죽음을 끌고 갈 수 있을까

 

흑점을 품고 파도에 슥슥 마지막 심장을 갈면

검은 이마에 오소록한* 별빛 돋아나

 

은밀한 촉수 하나 몰래 꺼내 물 밖에 걸어둘 때

우리는 그걸 달빛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꿈에서 바라본 바깥은

구겨지거나 쪼그라들거나

바다로 걸어갈수록 바다가 무너지고

파도는 여덟 개의 질문을 덮친다

 

허무적거리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불가촉 밤을 갖게 되면

 

세 개의 심장이 와르르 쏟아져

잘려나간 서사는 모두 달로 환원된다

 

너무 질겨서 씹지 못하고 뱉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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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하다, 은밀하다, 포근하다는 의미의 제주어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시집 시골시인 - J(걷는사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