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분류 전체보기 5499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8)

♧ 어느 주검 참새가 죽었다 한 뼘도 안 되는 풀들도 함께 죽었다 아직 어깻죽지의 근육은 하늘로 치솟아 있고 잔털은 바람을 불러 세우는데 분주했던 공중의 날들 기록되지 않을 역사이며 깃털같이 가벼운 생이었지만 별것 아닌 생이 어디 있냐고 길 없는 하늘에 길을 내며 한 뼘 한 뼘 걸어온 허공이 모두 길이 되기까지 새털 같은 날들 그렇게 다녔다면 창공도 깃털로 낸 한 길 어느 외로운 주검에 관한 기사가 인터넷 뉴스 모퉁이에서 광고 박스에 눌려 있다 ♧ 비누 대리석 위를 걷는 경쾌한 맵시 본 적 있나요 만지지 말아요 커지는 것들은 모두 거품이에요 이는 거품만큼 자꾸만 작아져요 모양은 취향일지 몰라도 향기는 숙명이에요 오늘 하루도 젖은 몸 말리며 거품을 지울 거예요 ♧ 묵상 나는 지금 토끼풀의 조바심에 대하여 ..

문학의 향기 2023.07.29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3)와 배롱나무 꽃

♧ 말 – 김항신 한동안 그녀는 할머니, 라 했대 머리도 할머니 할머니 옷도 할머니 할머니 마음도 할머니 할머니 몸도 불뚝불뚝 한동안 그녀에게 말했었대 사십 대 미시족 머리도 옷차림도 그렇게 이국적이라고 다시 할머니를 봤어 팬데믹 오던 날 이제 그만 봄이고 싶고 가을이고픈 할머니 벨롱 머리 요정*은 이렇게 말했대 할머니~~~ 아직 괜찮아~요 --- * 벨롱 헤어샵 ♧ 영(靈)의 탈출 – 문무병 많은 걸 말하지 않겠소. 친구다운 수다 또한 서툴러 바람이 샘에게 드리는 선물 나의 발자국 하나와 영이 바다를 건너 다시 한 번 무심천변을 돌다 온 얘기를 나는 이를 ‘영의 탈출’이라 하겠소. 얘기를 거는 데는 큰마음인 듯 무심하고 자잘한 맘 가득 담아 인정 넘쳐나는 양(+)과 음(-)의 중간 영(0)이요 중심이니..

문학의 향기 2023.07.28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5)에서

♧ 단장 – 김석규 국회의원 세비는 솔방울이나 조개껍데기로 하고 그것을 가상화폐로 인정해 주식시장에 상장하고 ♧ 웨나치(Wenatchee)의 홈 산(Mt. Home)* - 김영호 웨나치 야영장에서 마주 보이는 낮은 산 홈 산은 나의 고향집 포근한 눈빛의 나무들이 가족 같았네 나의 상처를 만져 주는 키가 큰 소나무 일곱 살 때 하늘 가신 아버지였네 산허리를 내려와 흐,르는 산물이 누님 같았네 젊은 나이에 가신 당신의 울음소리 깊었네 그 산물 한 점 뜨니 손등에서 들국화가 피어 올랐네 하늘에 가서도 자식 걱정만 하시는 낮달 어머니. --- *미 워싱턴주 시애틀의 동부에 위치한 농촌 ♧ 너에게로 가는 길 – 이규홍 때죽나무 가지마다 하얀 꽃잎 종이 되어 매달려 있다 너에게로 가는 길 한 곳에 붙박여 옮겨 다닐..

문학의 향기 2023.07.27

정드리문학회 제11집 '박수기정 관점'에서(4)

♧ 화산도 곶자왈 - 오순금 용암이 흐른 자리 돌무더기 가시덤불 가다가 숲이 되고 가다가 그리움 되어 제삿날 어머니 무덤가 새소리나 놓고 간다 ♧ 아버지 - 오은기 ‘조금만 더 기다려 줍서’ ‘샛년 지금 감수다’ 돈내코 굽이굽이 돌아드는 물결처럼 화급한 나의 마음을 신호등이 막아선다 왜 이러나, 두 달 전쯤 간 장마가 왜 또 이러나 일본 중국 거덜 냈으니 다시 우리 차례라고 온종일 가을배추가 잠기도록 비가 온다 저녁 일곱 시 쯤 느닷없는 어머니 전화 세상에 눈 감는 일 ‘조금만 더 기다려 줍서’ 오늘이 생신이신데 뭐가 그리 급하신지요? ♧ 세천포구 - 이미순 위미리 동백숲은 간세 간세 간세다리 큰엉과 쇠소깍 사이 양푼 하나 달랑 들고 올레길 5코스 따라 동박새 재잘댄다 여름날 물때 맞춰 상군해녀 똥군해녀..

문학의 향기 2023.07.26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에서(2)

♧ 아침에 내리는 비 어젯밤 꿈속에서 들었던 빗방울 전주곡의 여음이 천지사방에 비가 되어 내린다 아직도 조금 남은 이 아침에 비의 무게에 눌린 바람이 지붕 위에서 잠시 멈추자 나뭇잎들이 잠시 웅성거리고 날아가는 새들도 놀라 몸을 턴다 어떤 풍경은 매우 익숙하지만 다른 어떤 풍경은 참으로 낯설다 그토록 햇빛 강렬했던 어제가 더욱더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다시 바람 거세게 불고 뒤뜰 대나무밭에서는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의 기호들이 놀잇감을 찾듯 여기저기를 어제 아침처럼 뛰어다닌다 ♧ 후박나무의 바람 두껍게, 아주 반질반질하게 윤기 흐르는 넓은 잎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은 늘 감출 수 없는 초록색이다 볼품없이 마른 작은 가지들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릴 때 쓸데없이 탁한 소리를 지를 때 그곳으로 자리를..

문학의 향기 2023.07.25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7)

♧ 읍내 교회 첨탑 십자가 위 비둘기 날아가고 하늘이 살짝 흔들렸다 유리창은 노을로 물들고 도시는 화장을 고치고 첨탑 너머 목욕탕 간판이 덩달아 번쩍이고 노인 몇 태운 마을버스 꽁무니 탈탈 흔들며 지나가고 포플러 잘린 가지도 새잎을 내밀고, 그것을 노을이 가만히 만지고 갔다 ♧ 미호천 백로가 백 년 동안 이 강을 찾는 까닭이 있었다 묘천이 미호천이 될 때까지 발목을 잘라 가는 강물 위에서 외다리로 서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 *묘천이라는 이름이 미호천으로 변하였다는 전언이 있다. 청주와 오창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 ♧ 둥구나무 무수한 혀가 있다는 것 그 혀만큼 세상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휘파람 불고 노래하고 집을 짓고 연애도 하고 숭숭한 몸집 세월만큼 부풀었지만 어둠이 골목을 숨길 때까지 떠..

문학의 향기 2023.07.24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2)

♧ 행방 - 김병택 겨울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 여기저기 떠돌던 탁한 소리들이 초가집 등불 앞에 기립한 채로 모여들었다 심심할 땐, 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일부러 가사를 바꾼 ‘렛잇비’를 낡은 집 뒤뜰에서 여러 번 불렀다 억지로 들판을 건너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매일 바라보는 산은 어느 날, 어느 시간에도 성직자처럼 낮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무에 앉은 매미들이 합창소리와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이 함께 바다 속으로 우르르 물러가곤 했다 메마른 산등성이를 달리던 노루가 웬걸, 아득한 공중을 향해 뛰어올랐다 요즈음과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의 이념 금속성의 연설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제, 한 톨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 밥심 – 김순선 오랜 세월 견디어 온 고목 같은 식당 이름 식..

문학의 향기 2023.07.23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4)

♧ 새들의 저울 - 김명숙 새들에겐 저울이 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은 발바닥 저울을 믿는다 무게를 재지 않아도 중심을 잡고 사뿐히 내려앉는 저 믿음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날개가 추락한다는 걸 알기에 그들의 믿음엔 흔들림이 없다 세상의 부모는 사랑을 무게로 재지 않는다 자식의 일 앞에서는 윤리 도덕이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잠시 잠깐 휘청대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처럼 헌신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 순간의 꽃 - 나병춘 돌에도 꽃이 피랴? 종일 돌아 앉아 돌덩이인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햇살이 다가와 꼭 껴안아 주자 그늘에만 숨던 마음 화사하게 풀어놓는다 어디선가 흰나비 하나 위로하듯 어깨에 사뿐 앉는다 뜬금없이 나비가 떠나가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오붓한 순간 꽃자리 그 ..

문학의 향기 2023.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