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산림문학' 초대시 - 이상국

♧ 귀때기 청봉 나는 아직 설악 상상봉에 가 보지 못했네 이 산 밑에 나서 마흔을 넘기고도 한 해에도 수만 명씩 올라가는 그곳을 나는 여태 가보지 못했네 그곳에서는 세상이 훨씬 잘 보인다지만 일생을 걸어도 오르지 못할 산 하나는 있어야겠기에 마음속 깊은 곳에 대청봉 묻어 놓고 나는 날마다 귀때기 청봉쯤만 바라보네 ♧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 2020.12.19

제주작가 2020 가을호의 시들

♧ 말의 주변 풍경 – 김병택 태초에 있었던 ‘말씀’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이하는 그는 오래 전부터 말이 많다. 말 없는 사람은 ‘없는 말’로 살고, 말 많은 사람은 ‘많은 말’로 산다. 말 없는 사람에게는 기억해야 할 말이 없지만, 말 많은 사람에게는 기억해야 할 말이 많다. 말 많은 사람인 그는, 지금도 이미 쏟아낸 말들을 주워 담지 못해 힘든 나날을 보낸다. 말 많은 사람의 입에서 출발한 말들은 넓디넓은 허공을 부유하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해를 입고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들을 향해 화를 내며 소리칠 때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지금도 많은 말들로 집을 짓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운명이다. ♧ 한..

아름다운 세상 2020.12.07

고성기 섬 시조 모음

♧ 섬에 사는 것은 섬에 사는 것은 바다를 보는 것이다 바다를 보는 것은 외로움에 갇힌 것이다 외로움 그리움 되면 문득 섬이 되는 것이다 외롭다와 그립다를 꼭 나누고 싶다면 내가 섬인지 섬이 나인지 나누어 봐야 한다 나누지 못하는 날은 이미 하나인 것이다 ♧ 섬사람 섬에 살아도 산을 향해 앉으면 발아래 파도소리 바다를 향해 서면 쌓이는 산새소리 섬사람 섬에 살아도 섬 하나 묻고 삽니다 삼십 년 기다리다 섬이 되어 앉은 사람 원혼굿 파도에 씻겨 동백으로 지는 갯가 섬사람 바다 한복판 등불 들고 삽니다 ♧ 섬 그리기 오늘도 섬 그리기 바다부터 그립니다 분명 섬을 그렸는데 어머니 얼굴입니다 파도는 어머니 주름살 펴질 날이 없습니다 분명 바다를 그렸는데 어머니 가슴입니다 무자년 울음 자국이 멍울 되어 섬입니다 ..

아름다운 세상 2020.12.02

권도중 시집 '그대 거리가 색으로 살아있다'

♧ 나비의 몸짓 아직 오지 않았고 이전의 고독마저 순간과 수도 없이 겹쳐지고 있었다 나비가 필요한 꽃이 그 경계에 피었다 안 보이는 슬픔의 빛깔이 접었다 펴는, 스러지기 위해 맺히는 이슬의 짧은, 나비의 몸짓 기다린 꽃이 가진 많은 첫, 첫 볼이 붉어질 첫정이 간절해질, 새벽의 집중을 몸이 먼저 알아갈 때, 몰입이 첫 arrive의 순간 아득한 절벽, 젖은 날개의 빛이 어둠을 벗길 때 싹은 벌써 파릇하다 젖을 수 있다면 흠뻑 봄비가 가지와 풀 섶에 나비를 깨웠던 것이다 ♧ 물빛 그림자 너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너의 위안이 된다 네 상처 내 걱정에 네 모르게 고여지는 눈물엔 네 죄가 씻기고 있는 물빛 그림자 * 힘든 친구가 왔구나 다독여 보내도록 네 곁을 간 눈물은 네가 모르는 천지의 목련도 위안이 되겠지..

아름다운 세상 2020.11.25

나영애 시집 '각설탕이 녹는 시간'(2)

금년에는 몇 차례 태풍이 제주 섬을 스쳐 가서 단풍잎 색이 짙어질 겨를이 없었다. 밖으로 노출된 잎들은 벌써 떨어져버리거나 상처 난 부위로 바이러스가 침투되어 말라버리거나 얼룩이 졌다. 그래도 다른 나무들 사이에서 바람을 덜 탄 잎들은 그늘이어서 색이 짙어지지 못하거나 아직 다 물들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 일요일 고운 것을 열심히 찾아 찍어다 편집해서 보내온 시집의 시들과 맞춰 올린다. ♧ 그대는 활력소입니다 암울한 결과로 활동의 날이 짧아질 것 같아 묻어 두었던 것들이 서두르라 합니다 사랑만 하기에도 짧은 시간 전하고 싶은 별 같은 말이 있거나 품 넓힐 일이 있다면 지금 하라 깃발처럼 펄럭입니다 그대에게 깃발 보이거든 토닥임 한마디 보내 주십시오 내 낡아가는 육신에 새 세포 하나 만들어질 것입니다 내 ..

아름다운 세상 2020.11.14

가을밤에 쓰는 편지 – 박흥순

♧ 가을밤에 쓰는 편지 – 박흥순 그리움은 달빛 속에 걸어두고 귀뚜라미 소리나 따르다 어느 늙은 감나무 아래 누워 잘 익어가는 볕이나 헤아리며 추억의 바닷가 화진포 파도소리와 앳된 소녀처럼 볼 붉어지던 모습 파도가 감추어주던 그때 그대 모습 그려 보려 합니다, 어쩌나요, 귀뚜라미가 담장을 넘어요, 소리로 노래로 달빛을 타고 그대 계신 푸른 방으로 스며들려나 봐요, 내 안에 화진포 파도소리가 밀어로 그리움으로 추억으로 밤의 깊이를 더해 가고 있는데 가을달밤의 귀뚜라미소리에 묻혀버려요, 그대여! 국화꽃이 피려고 몸짓하는 소리가 들리는 달밤이에요. * 박흥순 시집『장다리꽃』(문학아카데미, 2020)에서

아름다운 세상 2020.10.24

'산림문학' 녹색문학상 수상작가 시

♧ 낙산사 의상대 노송 일출 - 박희진 의상대 앞바다, 망망대해에 자욱했던 어둠을 노송은 빨아들여, 혼신의 힘을 다해 밤새도록 시나브로 빨아들여 마침내 노송이 칠흑의 묵송 되자 수평선 뚫고 해가 솟아올라 바다 위에 황금의 기왓장 까누나。 해 바다 소나무가 제각기 극명한 제 모습 지니면서 간격이 없는, 완벽하게 하나를 이룬 이 찰라 속 영원의 조화 보라。 이 아름다운 극치의 황홀 보라。 *2012년 수상자 ♧ 숲의 소리를 들었는가 - 조병무 아무도 모른다 숲의 소리를 이웃하는 새들이 찾아와 들려주는 새벽 무한의 소리를 누군가 엿듣다 달아나는 시늉 속에 숲은 마음을 연다 늘어진 나뭇가지 붙들고 세상 찾아 헤매는 청설모 다람쥐 오고 갈 때 들었는가 또 한 소리를 숲은 흔들리며 마음을 숨긴다 어느 결 나뭇잎 사..

아름다운 세상 2020.10.03

이웃을 돌아보는 추석으로

세상 보지도 듣지도 못한 ‘코로나19’라는 희안한 게 나타나 세상 문화를 바꾸고 모든 게 정체된 가운데 맞는 추석. 흉흉한 세상일수록 말도 많고 탈도 많다는데, 마치 이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 특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하는 일마다 트집 잡고 서로 꼬투리를 잡아 끌어내리려고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이상한 ‘명절’이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올 추석은 우리가 바쁘다고, 아니면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다른 사람들이야 죽이 되든 말든 외면하며 살고 있진 않은지 조용히 되새겨보며, 이웃을 보살피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 추석 - 엄원용 꼭 제사를 지내야만 추석이더냐 퍼내도 퍼내도 부족함이 없는 저 밝은 달을 그릇마다 담아 형님 아우님 만나는 기쁨을 상마다 푸..

아름다운 세상 202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