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고연숙, 수필집 '노을에 물들다' 발간

♧ 책머리에 …나이가 드는 것에 비례하여 삶의 지혜로운 눈도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매사에 여전히 어리석고 모자라다. 하지만 늙는다고 서럽기만 할까. 인생의 무거운 짐을 부려놓고 서산에 지는 노을을 지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나이에 이르니 차라리 홀가분하다. 그동안 힘들었던 삶으로부터 비워지는 시간, 바람 자고 물결 고요해지는 시간에 노을을 바라볼 때는 한없이 황홀하다. 하루가 저물 때의 노을이 아름답고 가을이 깊어져야 귤 향도 짙어진다 하거늘, 내게 그런 시간이 왔다. 태어난 지 엊그제 같던 손주가 감귤처럼 무럭무럭 자라 혼자 힘으로 걸어 다닌다. 저들의 영롱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도 더욱 밝고 아름다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 노을에 물들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서쪽 하늘에 ..

아름다운 세상 2021.02.23

최기종 '이런 시'외 4편과 변산바람꽃

♧ 이런 시 어젯밤, 아픈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태풍으로 땅이 얼려서 상사화가 죽순처럼 돋아났다고 고사리처럼 피어났다고 그런데 곧 진다고 내일 만나자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전화 했더니 그걸 기억하지 못하고 딴소리다. 뜬금없이 시가 뭐냐고 물어온다. 나야, 말문이 막혀서 그게 뭐냐고 되물었더니 ‘인정머리’라고 했다. 그거 없으면 시도 뭣도 아니라고 했다. ‘아, 시가 사람을 감싸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뒤가 켕겼다. 이제까지 그가 귀찮아서 거리만 두었다. 오늘은 시가 되어서 자리 깔아놓고 들어주기로 했다. 길게 들어주는 게 시였다. ♧ 사랑 하나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풀씨 하나 내 집에 자리 잡았다 움트는 것은 모두가 부끄럼이었다 그리움 하나 내 밭에 뿌리내렸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

아름다운 세상 2021.02.13

신축년 설날 아침에

2021년 새해가 밝고, 벌써 2월 중순이지만 정작 설이 지나지 않으니 새해를 맞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쥐가 찍찍거리며 사라지고 믿음직한 소가 등장하는 신축년 설날 아침에야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드나든 분들께 그제 찍은 매화로 세배를 드린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좀 참고 기다리며 주사도 꼭 맞아서 가을부터 우리 마스크 벗고 마음껏 돌아다녀요. 그리고 만나서 한 잔 합시다. ♧ 새해엔 - 未松 오보영 행복만 노래하면 좋겠다 새해엔 좋은 세상만 눈에 띄고 아름다움만 보이면 좋겠다 새해엔 제발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서 상식이 통하고 정상이 대접받는 그런 사회 그런 나라가 되어 오로지 고난 받는 이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좌절한 이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그런 자유를 드높이는 환한 노래 밝은..

아름다운 세상 2021.02.12

김광렬 '존재의 집'의 시(5)

♧ 겨울밤 그 곱던 살과 뼈 모두 어디로 갔지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함박눈 퍼붓다 살포시 멈춘 밤하늘에 시린 별꽃이 피어난다 허공 담벼락 아스라이 기어올라 기어이 어머니는 별이 되었다 찌그러지고 속이 텅 빈 깡통처럼 내줄 것 깡그리 모두 다 내어준 뒤 ♧ 소금 어머니 -터키 소금호수에서 먼 곳 떠나 본 일 없는 어머니가 먼 저승길 걸어 이곳까지 온 모양이다 소금처럼 짜디짠 세월 소금처럼 짜디짠 눈물 한 방울 집어 혀끝에 대본다 오래 잊었던 그리운 이 짠맛 내 안으로 들어온다 들어와, 또 다른 광활한 소금호수를 만든다 슬픈 어머니가 내 눈에서 쉴 새 없이 흘러, 흘러나온다 ♧ 살아 있다는 것, 그 눈물 나는 기쁨 눈물샘을 자극해서 눈물이 나는 사람은 행복하다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아도 저..

아름다운 세상 2021.02.04

입춘, 불안감을 떨쳐버리자

영춘화(迎春花)가 피고 다시 입춘(立春)이 돌아와 ‘입춘 굿’은 비대면으로 한다는데, 작년에 호기롭게 썼던 거 또 써 먹어야겠다. ‘감기만씩 한 거 소주에 고춧가루 넣고 훌훌 저어 마시면 지까짓 게 안 나가고 배기냐.’던, 우리 할아버지 말씀마따나 코로나바이러스가 뭐라서 세상을 이리도 불안불안 하게 하느냐. 입춘이면 대문 앞에 크게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 써 붙이고 그 아래 ‘코로나 바이러스 너 이놈 오기만 해봐라, 구워 먹어버릴 테다’라고 덧붙이고선 신경 쓰지 말고 살아봐야지. 평소에 몸을 건강하게 한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서 끄떡없다는데. ♧ 입춘 - 하두자 편지가 왔다 눈물 섞인 바람 속을 떠난 뒤 소식 끊겼던 그대 손 끝 시린 어둠의 시간들을 지나 꽃눈 하나 피우며 오고 있다는 그..

아름다운 세상 2021.02.03

최기종 시집 '목포, 에말이요' 발간

♧ 시인의 말 목포살이 몇 해당가? 손꼽아 시어봉께 삼십육 년이네그려. 그런디 아직도 목포는 생소허기만 허다. 이유는 딱 하나 목포에서 태어나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포 벗들과 약주도 허면서 잘도 지내다가도 행여 용댕이바다를 건넜다느니, 동목포역에서 공짜 기차를 탔다느니, 동명동과 용당동이 순 뻘밭이었다느니, 수문포니 불종대니 멜라콩다리가 어쩠느니, 외팔이니 물장시니 쥐약장시가 어쩠느니, 이런 추억담으로 흐를 때는 머리가 하얘진다. 그런디 교직을 은퇴하고도 여길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내 고향 당봉리가 그리운디도 여그 머무는 까닭은 목포에서 살아온 세월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귄 벗들이 수두룩허고 거리거리 골목골목이 산도 바다도 섬들도 나를 붙들기 때문이..

아름다운 세상 2021.01.22

'제주작가' 2020년 겨울호의 시조(1)

♧ 연북로 상사화 - 김연미 너에게로 가는 길은 육차선 무단횡단 일방통행 같은 사랑 그 반쯤을 건너와 참았던 숨을 뱉는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무 빨리 왔나 잡초처럼 돋는 불안 건너야 할 남은 반이 주춤주춤 겁이 난다 이대로 돌아서버릴까 차들은 끊이질 않고 사랑에 목숨 걸 만큼 단순하진 않았는데 돌아갈 길이 없다 점이 된 화단 속 저 비난 경적 소리에 붉어지는 상사화 ♧ 불면 - 김영란 늘어진 테이프 같은 하루 위에 또 하루 사랑이 모자라서 사랑이 더 아픈 걸까 치명적 눈빛에 갇혀 죽음을 입 맞추던 ♧ 빗물을 대하는 방식 – 김영숙 어머니 집지슬에 성제추룩 모여 앉앙 세숫대야 낭푼이 헌 밥통에 돗도구리 지슷물 무사 데껴부느니 걸레 ᄈᆞᆯ곡 마당 씻곡 큰 그릇엔 퉁소 울고 작은 그릇 실로폰소리 하모니..

아름다운 세상 2021.01.21

이상국 시 '겨울 추상화抽象畫'

♧ 겨울 추상화抽象畫 - 이상국 1 한번 떠나간 새벽은 돌아오지 않고 하늘에서 별은 피고 진다 추녀 끝에 돌을 베고 누운 잠, 깨어 있던 그대의 이목구비. 컴컴한 기침소리는 바람에 몰려다니고 외딴 마을에서 개가 짖는다. 저문 길을 데리고 당도하는 야행夜行의 끝 마을 어두운 뜨락에서 뿌리를 산발하고 부르는 교목喬木의 노래, 이 밤에 세상 밖에 따로 깨어 실은 목이 메는 그대의 노래. 2 그대 밤새워 부르는 노래가 그대 하나의 잠도 밝히지 못할 때 파블로 피카소여 당신의 세기적인 무지로도 저 추운 교목의 키를 낮추진 못한다. 어둠은 굴뚝보다 깊고 모든 길들이 바람이 되어 날리는 곳 한 해에도 키를 넘게 자라나는 슬픔의 숲에서 봉두난발의 사내가 어둠을 빗질하고 있다. 3 그대가 한 그루 나무로 서서 떠나간 풍..

아름다운 세상 202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