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1625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4)

♧ 따라비 물봉선 – 양시연 따라비 가는 길은 묵언정진 길이다 그것도 가을 하늘 단청 펼친 오름 앞에 어디에 숨어 있었나, 놀래키는 물봉선 그래 저 떼쟁이 예닐곱 살 떼쟁이야 선천성 농아지만 그래도 소리는 남아 어마아, 어마 어마아 그 때 그 소리는 남아 그때 그 소리만 붉디붉은 꽃으로 피어 꽃을 떠받치는 저 조막만한 하얀 손 나에게 손말을 거네, 어마아 어마어마 ♧ 두륜산에 걸린 봄 - 김미영 나는 왜 땅끝에 와도 북쪽만 보는 걸까 굽이굽이 두륜산 둘러앉은 봉우리들 그 속에 땅나리 같은 대흥사도 피었다 그래서 내 발길도 예까지 왔었나보다 그댄들 연리근 앞에 약속 한 번 없었을까 물소리 굽이쳐가도 여태 남은 저 낮달 때마침 장삼 자락 어느 청춘 걸어 나와 종 한 번 고백 한 번 당 목에 실어낸다 내 가슴..

문학의 향기 2023.06.02

문영종 시집 '물의 법문'의 시(1)

♧ 나의 잠 속에 바다는 나의 잠 속에 바다는 고요한 어둠이다 별들은 바다 피 빨아올려 곱게 빛나 물소리 깊어 어둠만큼 출렁이고 머뭇거리는 한 점 바람 없고 물길조차 없는 바다에 누워 고요하게 눈 뜨는 빈 배 하늘 끝까지 출렁이는 어둠의 고요 수평선을 껴안은 채 뜨겁게 밤바다에 나가 있었네 바다 발소리, 날갯짓 소리 바다는 무덤 속 빛깔로 숨죽인 채 허공에 떠 있고 맨발로 떠도는 것 모두 나의 잠에 스미어 스멀거린다 눈먼 물고기 하나 밤새 온 바다 휘젓고 있다 ♧ 늙은 배의 꿈 1.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려고 해 살 속엔 녹슨 피 떠돌아 허파의 바람도 허하군 늪 같은 잠 그리워 심장의 피는 불꽃 시들어가고 등뼈는 고목 등걸 밑창엔 세월의 따개비 잔뜩 붙어 발걸음 붙잡곤 해 바다와 첫 만남은 황홀이었지 ..

문학의 향기 2023.06.01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은'(5)

♧ 빈손 작대기로 탁탁탁 털어내는 어머니 쭉정이 이리저리 흩어지던 시간 앞에 손안에 참깨 뭇들도 기꺼이 함께 했네 곰방메 섭골갱이 소라 보말 날미역 뜨인 눈 한 순간도 손을 놓지 않았네 어느 날 다 놓아두고 저 건너에 간 빈손 ♧ 용수리 소고 단발머리 소녀가 넓미역을 따던 곳 그 건너 성창동네 긴 머리 땋은 숙자 캄캄한 콘크리트 속으로 하나둘 묻혀가네 절부암 열녀마을 굽이돌아 저 차귀도 용마저 떠날 것 같은 한숨을 푹푹 쉬고 찔레꽃 눈물 날리는 아버지의 당산봉 용수포구 접한 땅 급매물로 팝니다 힐긋힐긋 눈치 보는 감정가와 낙찰가 어쩌나, 내 소녀의 눈 용수리가 팔려가네 ♧ 제주해녀․11 한평생 항해라야 발동선 하나였네 자나미* 뒤로 하고 물 말아 밥 한 숟갈 난바르 뱃길 물결은 해녀노래 추임새 상군해녀 ..

문학의 향기 2023.05.31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5)

♧ 호박 중심 – 이향지 단맛에 끌려 앉혔으니 호박이 우리 밥상의 중심이었다 흐린 아침이면 더 밝은 등을 켜던 호박꽃 호박 하나 따다 줄래 따낸 구덩이에 잔반을 묻어주던 어머니 따다 드리면 너무 작다 퇴짜 맞고 다시 따온 호박에는 씨가 쪼로로 박혀 호박은 내 이명의 태초 호박 하나 따다 줄래 싫을수록 더 멀리로 달아나던 귀 골짜기가 많아, 골짜기가 많아, 흔들어 보면 호박씨 메아리 더 세게 흔들면 엄마의 잔소리 넝쿨 호박을 먹고 호박에게도 먹이며 길고 무더운 계절을 붙잡고 넘었다 어떤 호박이나 떡잎 두 장으로 시작하지만 장독대 옆 호박은 불같아 먼저 흙이 되고 밭두렁 누렁탱이는 서리 때까지 버텨 보약이 되었다 단맛에 끌러서 모였으니 우리 밥상의 중심은 바뀔 줄을 몰랐다 ♧ 기린 – 장문석 기린은 아주 잠..

문학의 향기 2023.05.30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3)

♧ 부활절 아침 – 양시연 그냥 가도 좋으련 아주 가도 좋으련 섬 건너 오름 건너 담장 건너 마당까지 온 세상 메아리 돌 듯 돌고 도는 돌림병 내 남편은 어디서 어떻게 걸렸을까 세상에 반항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나, 전단지 받아들 듯 아침저녁 겸상하고 숟가락 바꿔 봐도 스스로 네 인간성 네가 알 거라는 듯 내게는 구원의 손길 내밀지를 않는다 ♧ 홀어멍 국수집 - 김미영 누구나 그렇게들 살아낸다 하지만 변소 표 공동수도 걸쭉한 욕 한 바가지 국수 맛 소문난 그 집 서문시장 한 귀퉁이 홀어멍집, 화투패도 딱 맞아떨어진 날 족발에 쌀막걸리 흥얼흥얼 탑동바다 그때쯤 어느 단골의 수작질도 보인다 하굣길 삼삼오오 재잘재잘 단발머리들 슬쩍 기운 사내 어깨, “아빠 온댄 전화 왔어요” 새초롬 말 ..

문학의 향기 2023.05.28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은'(4)

♧ 주파수 내 방엔 매일 듣는 라디오 있습니다 밤 열시만 넘으면 어김없이 노크하는 몸 낮춘 세상 소요를 꿈결에서 듣지요 정해진 채널 외엔 관심이 없습니다 절로 절로 드나드는 놓아버린 마음처럼 늦도록 흔들림 없이 다가오는 주파수 주파수 그 건너에 슬픔이 있습니다 아련한 내 잠결 속 눈물이 스며들어 날마다 무명 베갯잇 얼룩져 있습니다 ♧ 생각의 차이 만 원을 훌쩍 넘기는 점심 한 끼 먹는 사람 만 원쯤에 팔리는 시집을 보고 나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 아깝다고 말하네 무슨 말 늘어놓는지 시인만 중얼중얼 만 원 한 장 아깝겠네 초라한 시집 한 권 요즈음 입맛 돋우는 먹는 것만 하랴만 사람아, 사서 먹는 바닐라 라떼 한 잔 한 끼만 배 부르는 포만감을 주지만 나 때는 시집 한 권이 인생울 바꿨다네 ♧ 스마트폰 스마..

문학의 향기 2023.05.27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3)

♧ 먼 동네에서 이발하고 싶은 날 - 강덕환 뜬금없어도 좋다 고맙게 잘 받았다고만 하고 이러저러 꽂아 둔 시집 하나 챙겨 들고 환승하면 되지 뭐, 굳이 노선버스 익히지 못해도 방향만 맞으면 버스를 탄다 창가 쪽이면 덜컹거리는 맨 뒤 좌석이어도 좋다 햇빛이 들면 읽던 시집으로 가리고 졸린 눈은 차창으로 스미는 바람결에 맡겨줘도 좋다 언뜻 키 큰 정자나무, 그 옆 빙빙 도는 빨파흰 이발소 표시등이 보이걸랑 허둥대며 하차 벨을 누르자 선뜻 들어서 단골일 것 같은 유리문 힘주어 열면 훅, 포마드 냄새 와락 안기던 낮은 지붕 삼거리 이발소에서 하루를 몽땅 저당 잡혀도 좋겠다 먼 동네까지 와서야 비로소 늘어난 새치가 낭자하게 보이걸랑 예상치 않았던 염색이나 해볼까 아차! 카드기가 없지 현금이 없어도 외상이 통할까 ..

문학의 향기 2023.05.26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4)

♧ 감포 종점 - 박숙경 추령재를 지나면서부터 더 설레었네 포구에 닿으면 온 바다가 내 것인 양 들뜬 기분으로 읍내를 통과해야 하네 문득, 예리한 시선에 포착된 감포 종점 밤이 깊어야 했지만 분명 한낮이었고 나도 모르게 마포 종점이 입술을 빠져나왔네 있을 리 만무한 갈 곳 없는 밤 전차를 호출하는 사이 갈 곳 바쁜 자동차들은 녹슨 간판이 걸린 다방 거리를 지나가네 불행하게도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가는 사람들 눈빛에 담긴 무수한 기다림도 읽지 못했네 차들은 수평선 쪽으로 자꾸 달아나네 내가 이다음 지나가는 사람이 될 때 궂은비 정도는 내려주겠지 포구 맞은편 그야말로 옛날식 항구 다방 구석진 자리 물 날린 비로드 의자 위에 쓸데없이 명랑해지는 엉덩이를 주저앉히고 퀴퀴한 냄새 따윈 모른 체하며 늙은 마담의 주..

문학의 향기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