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조한일 시 '시詩를 내리다' 외 5편

♧ 시詩를 내리다 유리 액자에 표구된 시詩가 발칵 뒤집혔다 뾰족한 모서리에 금이 가고 말았다 뾰족한 한 마디에 금이 가고 말았다 수소문 끝에 재활용 마대 봉투를 구했다 수소문 끝에 재활용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잘게 깨서 넣으려고 신문지 덮고 밟았지만 잘게 깨서 쓴 구절들 저장하고 덮었지만 생각만큼 호락호락 조각나지 않았다 생각만큼 호락호락 써지질 않았다 시詩에 손자국이라도 묻을까 막아주던 유리 시詩에 눈길이라도 주라고 보냈던 첫 시집 가까스로 손 베이지 않을 만큼 깨뜨려서 가까스로 눈 아프지 않을 만큼 바탕체로 써서 조각들 수습하고 마대 봉투에 쑤셔 넣었다 시어들 수습하고 출판사로 쓱 보냈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닌 듯 잊어버리고 살 일이다 ♧ 동전 살면서 옴짝달싹 못 해 멈춰선 적 몇 번일까? 지폐에 치이..

아름다운 세상 2021.06.26

'혜향문학' 2021 상반기호의 초대시

♧ 풀숲이 환해졌다 - 조남훈 문득, 숲속이 환해졌다 산비알 콩밭 매던 여인 호미를 냅다 팽개치고는 황급히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눈이 부시도록 허여므레 푸짐펑펑한 엉덩이에 누가 난을 치는지 붓 끝이 환해지도록 일렁이고 내 가슴 덩달아 달아올랐다 산새들도 안절부절 지줄대고 바람도 설레며 후끈거렸다 내, 어디다 낙관을 치랴 ♧ 오늘이 詩다 – 김성춘 차렷, 마음 쉬엇, 번개가 치는 걸 보고도 번개를 깨닫지 못하다니!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고도 발밑이 별똥밭임을 발견 못하다니! 아침마다 해골을 만지고도 해골이 될 내일을 생각 못하다니! 하이고…… 달라이 라마 스승께서 웃고 계신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웃고 계신다 ♧ 바다를 암각하다 – 신필영 고래가 돌아온다, 파도를 앞세우고 돌 속에 잠들었던 신석기가 돌아온다..

아름다운 세상 2021.06.23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들(2)

♧ 달을 타고 삐걱삐걱 - 정재원 정박해 있는 물비늘 고운 배 저 커다란 달 한 번은 차고 한 번은 비고 절망과 희망이 묶여버려 허기 속으로만 흐르던 내 도랑물 너를 잘 기르려고 싸우다 참방대는 너를 건드리며 나는 울었고 스치는 곳마다 생겨나는 포말의 기록들 얼마 전 물빛은 스스로 통증이 아름다워서 달 앞에 무릎 꿇어야 했다 자주 오가던 바닷가 파도 위에 앉아 밀물지는 눈을 씻었다 ♧ 낙화암 - 김종욱 목숨의 무게는 시대보다 가볍고 생존보다 무겁다 그 무게와 대결하는 절벽의 바위가 되어야 한다 이끼 낀 바위는 청동 거울처럼 투명해져서 희미하고 오래된 형상을 비추고 그림자가 없는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된다 청록빛으로 녹이 낀 거울 터널을 지나면 강인지 바람인지 백마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시공간의 망각이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 2021.06.13

김규중 시집 '2학년과 2학년 사이에' 발간

♧ 시인의 말 제주에 있는 소규모 통합학교인 무릉초․중학교가 자율학교로 지정되면서 공모를 거쳐 학교장으로 4년(2015.3〜2019.2) 동안 근무했다. 통칭 혁신학교로 불리는 학교에서 학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또 다른 시선으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을 만나게 되었다. 유치원 입학생부터 중학교 졸업생까지 자신의 개성을 발하는 아이들, 묵묵히 지켜보거나 적극 목소리를 내는 학부모님들 그리고 교육의 본질을 찾아나가려는 선생님들, 그 모두와의 만남은 매우 소중했다. 모든 만남은 마음에 결을 남긴다. 이 시집은 4년 동안 내 마음에 새겨진 수많은 결을 갈무리하는 조그만 기록이다. 시집 말미 5부를 채우는 것은 학교 혁신 운동에 참여하면서 나의 가슴에 오래 자리했던 단어들(성찰, 자발성, 소통, 리더십, 헌신, 성장..

아름다운 세상 2021.06.10

양정자 시 '두 가지 시선' 외 2편

♧ 두 가지 시선 - 양정자 공연히 마음 울적해 친구 따라 마지못해 오른 관악산 산행 길 돌연 폭풍우 들이닥쳤네 우르르 쾅쾅 천지개벽하듯 하늘은 먹물 풀은 듯 캄캄해지고 사나운 비바람 몰아치는데 숲속 나무들 짐승처럼 울부짖었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겁쟁이 우울한 비관주의자인 나, 중얼거렸네 저 고뇌에 가득 찬 나무들을 좀 바라보라고 머리를 온통 산발한 채 꺾어질듯 휘어질듯 몸부림치는 가여운 나무들 저렇듯 세차고 모진 삶의 시련 속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뭇 인간군상들 같은 저 캄캄한 슬픔의 모습들을 어두운 나에게 늘 환한 빛이 되어 주던 낙관주의자인 내 친구는 오히려 신명나게 소리쳤네 저 환희에 가득 찬 나무들을 좀 바라보라고 오랜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비바람 만나 온몸에 팽팽한 촉수를 내뻗고 환호작..

아름다운 세상 2021.06.07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 (2)

♧ 찔레 - 이승은 누가 숨겨 두었다면 숨어서 지냈다면 꽃 아닌 적 없었다는 그 말 이제 알겠다 한 시절 설핏한 둘레 하염없이 피었다는 해마다 유월이면 손사래 치던 당신 소주를 사발에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총성에 찢기는 하늘 까무러쳐 지더라는 전쟁 끝에 덩그러니 외눈으로 돌아와서 가파른 여울목에 낳아 기른 다섯 남매 가끔씩 꺼진 눈자위 없는 눈을 찔렀다는 ♧ 초록 - 이정환 석 달 열흘 동안 속 깊이 잉태했다가 대지 위로 뿜어 올린 겨울은 잠적해도 초록은 어머니 품을 잊지 않을 것이다 무성히 우거지면서 숲을 이룬 온 누리 내리쬐는 볕살 속으로 숨 쉬는 이파리들 초록은 돌아갈 날짜 잊지 않을 것이다 ♧ 별을 보며 - 임영석 침묵을 기둥 삼아 집 한 채 짓고 싶다 아무리 많은 사람 망명을 해 와도 침묵의 기..

아름다운 세상 2021.06.05

윤병주 시 '생의 그림자' 외 3편

♧ 생의 그림자 한여름 사막의 건기에 낙타 한 무리가 정오의 햇살을 건너가고 있다 멀리 서 있는 구름 몇 층이 짐을 얹고 가는 낙타의 생을 위로해 준다 태양과 사막의 상인들은 서로의 열기로 같이 건너야 하는 것이 숙명일지 모른다 짐을 얹고 사막을 넘어서야 살 수 있다 노동하다 버려진 뼈들을 밟고 살아야 하는 것이 낙타와 상인들의 운명일지 모른다 사막의 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멀리 선 나무 몇 그루 아래 사람들의 광기처럼 사막을 지키고 있다 참 예의 없는 현실의 노동들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살다가 짐을 얹을 힘이 없으면 빈 병처럼 버려지는 것이 낙타의 일생일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의 부음이 문자로 왔다 사회를 비판하면서 쓴 그의 시는 얼마에 팔리게 될까 ♧ 어느 여자 시인 그녀는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 2021.06.03

정인수의 '칠십리사설'과 '콩잎쌈'

♧ 칠십리사설 – 정인수 서불徐市님 저녁놀 헤치며 노 저어간 포구였네. 삼신산 불로초 캐러 왔다가 그만 산수에 취하여 정방 석벽에 넉 자만 새겨놓고 넋을 잃고 떠났다네. 아무렴 그렇지 몰라서 물어? 여기가 어디라고… 설문대할망 희멀건 몸 벗어 실 한 오라기 안 걸치고 벌렁 나자빠져, 그 아릿다운 계곡과 구릉과 그늘진 숲, 천향의 과일들을 스스럼없이 빚어 놓았지. 파아란 하늘이 떨어져 괸 천지연 못물 위로, 뜨거운 합환合歡으로 자지러지는 폭포, 지상의 마지막 정력으로 치솟은 남근의 고석포孤石浦, 외돌 그 길게 드리워진 외로운 그림자 저쪽으로 열리는 유성음의 아침바다에는 옛 사연 모르는 주낙배 붕, 붕, 붕, 붕 줄을 잇고, 칠십리 창공을 차며 나는 갈매기들 둥우리 트는 법섬, 문섬, 섶섬, 새섬들이 심장을..

아름다운 세상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