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353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 (1)

♧ 골목책방 - 김연미 당신은 잠에서 깬 아이처럼 작아져요 밑줄 친 어느 날이 골목을 돌아가면 맨 끝에 진열된 여름 아삭아삭 읽어요 부재중인 사랑보다 달콤한 게 있을까요 받침 없는 의자가 반짝이는 간판 내가 쓴 눈물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죠 바람의 활자들이 편지처럼 자라는 책방 초록빛 그늘 자락 꽂혀진 정오쯤에 오래 전 당신이 썼던 나를 두고 갈까 봐요 ♧ 백년의 유품 - 김일연 피멍 든 손가락으로 고통을 다스리셨다 서대문 형무소의 고문실 복도에 핀 유관순 화병받침은 한 송이 들꽃이었다 자유의 나라에서 푸르게 살아가거라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어 슬픈* 한국의 하늘을 닦아 받쳐 들고 계셨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 ♧ 달 - 두마리아 일 년 내내 오픈런 개런티는 받았니 명목은 주연배우 배역은 들..

아름다운 세상 2021.05.29

윤병주 시 '구름의 실루엣' 1, 2

♧ 구름의 실루엣 1 그대가 떠났던 구름의 집은 이제 허물어졌다 몸속을 파고드는 그대와의 추억 가난한 사랑의 기억을 나무의 푸른 마디에 담기 위해 나는 숲에 뜬 낯선 별 하나로 살아야 한다 잊혀져가는 밀애의 기억을 되짚으며 말라가던 탐욕을 손가락 마디에 얹는다 서로를 연민했던 길목을 돌아보며 다시 지상의 통속적인 슬픔을 허락 받는다 한낮에 절망들로 떨어진 꽃들을 보며 긴 담벼락 기대어 안쓰러운 기억들을 보듬어 본다 좁은 계단을 한참 내려와 창밖의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녹이 슬어가는 경계를 구별할 바퀴 하나를 세워두고 서로 금기시했던 말들과 부서지며 변해가는 어둠을 읽어본다 보름달같이 서로 욕망의 말이 깊어져 지나간 시간들이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했을까 그대 뒷모습으로 가는 입구는 하나다 다시 고인 구..

아름다운 세상 2021.05.23

나기철 시 '오월의 방' 외 4편

♧ 오월의 방 은초롱꽃 날리는, 그때와 똑같이 그렇게 어디선가 들리는 네 목소리 ♧ 별후別後 눈 피해 눈이 자주 갔습니다 그 사이 달라진 머릿결 파동의 남오미자꽃 지금도 낭낭히 들리는, ♧ 젤라의 꽃 7 녹나무 그림자 생글대는 힐끔힐끔 내 목이 따라가던 몰래 계단 넘어 소성당으로 가던 ♧ 집중 죽은 정공철 당주제 끝나 국숫집에서 막걸리들을 하다가 마병 형의 영적으로 사귄다는 수녀님 얘기 내가 “옷 벗으면…” 하니까, 집중 안 하던 그의 얼굴이 빨개진다 ♧ 타고 동트는 구무타크 사막 물결 너머 타클라마칸 사막 타닥타닥 낙타 등에 타고 방울 소리 천산 너머 땀방울 쓰다듬고 모두 버리고 타클라마칸 타닥타닥 * 나기철 시집 『지금도 낭낭히』(서정시학 서정시 137, 2018)에서

아름다운 세상 2021.05.11

양정자 시 '진땀과 꿀' 외 2편

♧ 진땀과 단 꿀 꽃필 때마다 꽃줄기 마디마디에서 이슬방울 내뱉는 우리 집 몇 포기 서양난들 별로 돌보지도 못하는 데도 가끔씩 그 귀한 꽃들을 어렵게 간신히 피워내는데 메마른 그 척박한 좁은 화분 속에서 나름대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까, 꽃필 때마다 그 이슬방울 너무 힘들어 진땀 흘린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나 나만의 그 연민 너무 당연해 한 번도 의심해 본적 없지만 요즈음 꽃에 관심 많아 꽃피고 있는 난欄 유심히 살펴보면서 저것이 진짜 짜디짠 땀방울일까 번쩍 의심이 들면서 방울방울 맺힌 이슬 살짝 맛보니 아니, 이게 웬일! 놀랍게도 그건 달디단 꿀방울이었네 왜 나는 그걸 그렇게 오랫동안 추호의 의심도 없이 힘들어 흘리는 진땀이라 생각해 왔을까, 놀랍게도 요즈음 내 모든 생각이 단 꿀처럼 조금씩이나마 긍..

아름다운 세상 2021.05.10

'우리詩' 2021년 5월호의 시(3)

♧ 독거노인이 사는 집 -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 봄나들이 – 이수미 겨울 가고 ..

아름다운 세상 2021.05.09

어버이날에 보내는 시와 꽃

♧ 어버이날에 - 제산 김 대식 매년 해마다 어버이날은 오는 데 나는 무엇 하나 부모님께 잘한 것이 없어 죄송하기만 하다. 살아계실 때 조금이나마 잘해드렸더라면 이렇게 마음 아프진 않으련만 가슴에 못 박을 심한 말만 했던 나 자신이 지금에 와 너무도 부끄럽다. 유난히도 잔병치레가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의원 집을 많이도 드나들었다. 밤새워 배 주무르시는 어머니 손은 어느 의사보다도 잘 듣는 약손이었다. 어머니 손잡고 길을 가다 어머니 손 놓치면 세상을 다 놓친 것 같아 그만 땅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어머니, 못된 자식에게도 그리 사랑으로 주시기만 했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참 보고 싶은 나의 어머니 오늘은 무덤에라도 가서 울고 싶다. ♧ 아버지의 손 - 하영순 언젠가 아이들 피아노 선생..

아름다운 세상 2021.05.08

강방영 시 '베어진 자리' 외

♧ 베어진 자리 거대하던 몸이 사라졌어도 그 오랜 시간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어도 살겠노라는 뿌리의 외침 빼앗긴 과거의 자리에 꽃처럼 새 순들을 피웠으니 굳센 마음에서 솟는 희망의 가지들 새로이 다시 시작되는 시간의 역사 ♧ 그 모든 날들 뒤에 그 모든 날들이 저물고 그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갔어도 바다 그 자리에서 철썩이고 그 모든 꽃들이 시들고 그 모든 흰 눈이 다 녹아도 푸른 산 멀리 그 자리에 서 있다 태어난 모든 기쁨과 슬픔들이 숲에서 서걱거리다가 흩어졌어도 저 바다와 산이 마주 보는 어느 곳에서는 영원처럼 파도로 치고 있으리라 ♧ 영일만 해안 호미곶 가는 길 포기하라고 언제면 그만 둘 작정이냐고 묻는 듯 나무와 풀의 허리를 짓밟으며 바닷가 비탈에서 다그치는 바람 풀도 나무도 휘어져 일어서지 못하..

아름다운 세상 2021.05.06

김정수 시 '별들도 슬프면 그림을 그린다' 외

♧ 별들도 슬프면 그림을 그린다 어둠은 그리움의 도화지 쏟아질 것 같은 눈물로 그립다는 말 대신 그림을 그린다 별들이 뿌리는 눈물 별이 된 동생의 슬픔을 달래려 가만히 옆에 와 함께 울어주는 먹먹한 어둠일 때 눈물을 흘리며 그림을 그리는 별 ♧ 인생의 방파제 지나온 저 먼 길 가쁘게 살았구나 바다를 바라본다 방파제 끝에 서서 풍덩 빠지는 죽음 같은 삶 팔 뻗어 돌아오는 고깃배 품에 안고 하나씩 매어두면 꾸벅꾸벅 잠이 든다 끝까지 사랑한 사람 이름 부르며 바라본 그 끝 방파제 끝에 서면 잊었던 그 사람들 하나 둘 그리움이 뼈 속까지 아리다 다시는 보내는 일이 없어야지 아무도 ♧ 지갑이 돌아왔다 일년 만에 지갑이 돌아왔다 내용물은 다 빼앗기고 몸만 쭈굴쭈굴하게 돌아왔다 살만한 곳이 없었나 돈과 카드와 친구들..

아름다운 세상 2021.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