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1625

정드리문학 11집 '박수기정 관점'(7)

♧ 달과 고래 - 김영순 일부러 그대 안에 한 며칠 갇히고 싶다 행원리 어등포구 일곱물이나 여덟물쯤 기어코 월담을 하듯 원담에 든 남방돌고래 섬 뱅뱅 돌다 보면 거기가 거기인데 사람들이 내쫓아도 자꾸만 들어온다 네게도 피치 못할 일, 있기는 있나보다 먼데 있는 저 달은 들물날물 엮어내며 하늘에서 뭇 생명을 조물조물 거느린다 한동안 참았던 그 말 물숨이듯 내뿜고 싶다 ♧ 폭포 속으로 2 - 안창흡 -화가 강요배 선생의 畵題에 부쳐 저 저 저 섬 기슭 용솟음치는 물벼락 봐 천년바위 때리며 世上 世上 물보라 뉘라서 알아차릴까 萬年 품은 비밀 하나 ♧ 블루노트 - 이명숙 오늘의 소울풍은 제대로 취중 농담 너를 위해서라면 불편하지 않다나 인생은 게임이니까 처음 하는 거니까 우리들의 우주에 밤을 발기는 개들 취한 ..

문학의 향기 2023.08.23

'서귀포문학' 2023호의 시(1)

[고 오승철 시인의 대표작] ♧ 송당 쇠똥구리 ․ 1 겨울 송당리엔 숨비소리 묻어난다 바람 불지 않아도 중산간 마을 한 녘 빈 텃밭 대숲만으로 자맥질하는 섬이 있다 대한에 집 나간 사람 찾지도 말라 했다. 누가 내 안에서 그리움을 굴리는가 마취된 겨울 산에서 빼어낸 담낭결석(膽囊結石) 눈 딱 감고 하늘 한 번 용서할 수 있을까 정월 열사흘 날, 본향당 당굿마당 4.3땅 다시 와 본다, 쌀점 치고 가는 눈발. 그렇게 가는 거다. 신의 명을 받아들면 정 하나 오름 하나 휘모리장단 하나 남도 끝, 세를 든 세상, 경단처럼 밀고 간다. --- *송당리 : 구좌읍의 중산간 마을. 멸종 위기의 쇠똥구리는 이 지역 인근 오름 등에서만 볼 수 있다. ♧ “셔?”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 노루귀 너도바람..

문학의 향기 2023.08.22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 moon'의 시(3)

♧ 하루 하루는 24면의 신문이다 나는 자정이 되면 신문처럼 시간을 접어서 쌓아 놓는다 하루를 접어서 쌓아 놓는다 그리고 새로운 신문을 맞는다 가끔은 지난 신문 뒤적거려 먼지만 폴폴 날린다 나는 석간신문일까 너는 조간신문일까 나는 구독자일까 너는 발행인일까 내가 신문(新聞)보다 신문(新門)을 더 좋아하고 신문(新文)을 더 사랑하여 하루가 온통 문과 글로 보인다 하루는 24면의 신문이고 한 해는 365쪽의 책이다 ♧ 소망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여행하고 만 명의 친구를 사귀어라* 하지만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단 한 곳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만을 사귀고 싶다 나는 평생 단 한 권의 당신을 읽고 단 한 곳의 당신을 여행하고 단 한 사람, 당신만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만이..

문학의 향기 2023.08.21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의 시(2)

♧ 칫수 친구들끼리 당구를 칠 때도 약한 자에게 핸디캡을 주고 정정당당하게 하는데 세상은 모순이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그는 화점을 빼곡하게 차지한 학벌 인맥 지연 재산 중요한 곳은 모두 상대가 차지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지만 경기는 시작되었고 부조리한 규칙들은 법이었고 관례였다 새까만 암흑천지에 하얀 돌 하나 툭 던져 놓았다 밤하늘 수많은 별들 사이에 나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조그만 별이었다 무사히 살아갈 수 있을까? ♧ 미생 집 없이 떠도는 삶을 살아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비참한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렇게 많은 집중에 내 집이 없다는 것이 더 슬프다. 어렵사리 담을 쌓고 집을 지으면 무허가라고 도로가 없다고 사정없이 허물어 버린다 남의 집에 빌붙어 겨우 지내는 ..

문학의 향기 2023.08.20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3)

♧ 노부부의 통화 – 이수미 거기 요양 생활은 지낼 만하오? 입맛 없어도 끼니는 꼭 챙겨 먹고 반찬 입에 맞지 않으면 식당가서 입맛 돋우는 걸로 사 먹고 아파도 먹어야 통증을 이겨낼 힘이 납디다 꿈에 저승사자 자꾸 온다고 정신 줄은 놓지 마오 우리 만나면 손잡고 맛난 거 먹으러 갑시다 이번 항암 치료 마치고 당신 보러 갈 테니 여보! 그만 울어요 ♧ 회향 - 도경희 딸기를 딴다 생수 같은 오월 아침 한 생이 붉게 익어 골짜기 가득 아찔한 살 내음 풀어 놓는다 열매를 다 내어 준 딸기나무는 밑동째 잘려 어린 것에게 태양을 들여보낸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나 또한 한 해만 살고 가는 들꽃인 것을 ♧ 가장 위험한 동물 – 이산하 몇 년 전 유럽 여행 때 어느 실내 동물원을 구경했다. 방문마다 사슴, 늑대, 사자,..

문학의 향기 2023.08.19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6)

♧ 아침에 외 4편 – 김시종(곽형덕 옮김) 새해 며칠간은 채널을 돌려도 새해를 축복하는 웃음이 넘쳐났다. 화면 한가득 공감을 모으고 또렷이 영봉 후지산도 빛난다. 경사진 들판이 흐릿하고 아득한 도호쿠에서 녹슨 그네가 늘어진 채 삐걱대며 홀로 서지 못 했다. 온종일 바람이 휘몰아치고 사내는 조각상이 돼 고목 그늘에 있다. 싱글벙글한 내가 우연히 그것을 언뜻 보았다. 클로즈업된 그래프가 맹렬히 아래위로 움직이고 주가가 몹시 널뛰는 새해였다. 새해는 벌써 흥청댄다. 머지않아 초목이 움트는 신춘이다. 다시 돌아가지 못 할 집이지만 덩굴 풀 자라고 꽃이 핀다. 풀고사리 무성한 중생대까지도 혹은 넘어야만 할 막막한 시간이 그 언저리에서 떠돈다. 구름은 낮게 드리우고 눈을 뒤집어 쓴 묘비가 쓰러진다 나는 수선화처럼..

문학의 향기 2023.08.18

정드리문학 제11집 '박수기정 관점'의 시조(6)

♧ 순례길 – 정지윤 멀리서 종소리 꽃나무를 흔든다 능선을 자르며 떨어지는 꽃잎들 꽃들이 떨어질 때마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래가 출렁거린다 언제나 나에게만 들리던 그 노래 망초가 하얗게 흔들리고 시간이 우거져 있었다 ♧ 불란지 – 양희영 청수리 곶자왈로 반딧불이 찾아간다 캄캄한 더듬길에 소리도 불빛도 끄고 내 어둠 거두어가는 그 웃뜨르 꽁지들 --- *이상 두 수는 ‘제주를 노래한 시’. ♧ 씨앗의 힘 - 문순자 서울 사는 둘째가 카톡카톡 날 부른다 전시회에 왔다며 보내온 사진 한 장 “이건 뭐?” 내가 묻자 그만 울먹거린다 오래된 주문처럼 여섯 개의 유리병엔 홍두 메밀 흑보리 자색보리 갓 참깨 코르크 마개로도 못 막은 돌아가신 할머니 냄새 만지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좀팍..

문학의 향기 2023.08.17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3)

♧ 뼈와 인대 조개 한 마리 뼈 사이에서 조용히 부드러운 살을 내밀고 있다 위험을 감지한 조개 한 마리 부드러운 발을 뱃속으로 숨기고 꽉 다물어 버린다 밖에서는 더 이상 조개의 문을 열 수 없다 양쪽에 붙어 있는 하얀 인대가 뼈보다 힘이 더 세다 세상은 뼈가 아니라 인대가 움직인다 ♧ 딸꾹질 요즘 자동차들은 달리기 시작하면 철커덕, 감옥의 문이 잠긴다 문에 기대어 쉬던 하느님이 놀라 비틀거리며 잠금 버튼을 누르신다 공기가 오염되어 숨쉬기 어렵다고 딸꾹질하며 하느님이 가둔다 나는 걷는다 감옥의 문이 싫어져서 천사들이 좋아져서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 거리에서는 아직도 나의 포깍질 소리와 하느님이 딸꾹질 소리가 들린다 ♧ 관덕정 죽어서도 오백 년 천 년 쓰러지지 않는 나무가 있다 살아서도 투표용지 같은 잎들만 ..

문학의 향기 2023.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