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1625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2)

♧ 최후의 해녀 – 조한일 바다가 해녀보다 더 빨리 늙는다는 바닷속 사막으로 낙타는 갈 수 없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그곳일 순 없어도 양수 닮은 바다에서 알몸으로 살아온 조난 신호 내뿜는 주름진 저 향고래 사람은 늙었다는 것이 살아남는 거라지 물속의 갯녹음 현상은 실패한 테러라는 성게가 흰 바위에 찔라 쓴 자백서로 말한다, 최후의 해녀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 본향당 가는 길 - 한희정 오곡백화 만발한 고향, 늙은 흑인의 소원처럼 일뤠할망 뵙기 청하는 어머니 묵언정성 새벽길 초이레 달이 길마중을 오겠지 가난한 타성바치 어긋나지 않기를… 하천변, 잡목숲 지나 가쁜 숨을 내쉬면 저만치 마음을 여는 조배낭 우뚝 서 있네 ♧ 플루트와 그녀 – 강연미 플랫과 샵 사이 붉은 입술 내밀어요 하고 싶은 말들과 듣고..

문학의 향기 2023.08.06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1)

♧ 여백 – 정수자 백석 편에 숨겨 놓은 애인의 심화처럼 저음의 행간마다 눈썹 시린 여진은 때 없이 애가 마르는 통영 어느 물살 같아 돌아올 길 아예 잃은 무지외반 탁발처럼 먼물에도 자분자분 귀밑 세는 여진은 바람의 여음을 짚다 혀를 데인 풍경風磬 같아 ♧ 시래기의 힘 - 우은숙 행여, 기죽지 마라 환절기 몸살이다 맨 처음 네 입술이 세상 향해 삐죽일 때 성급히 너를 잊고자 흰눈을 기다렸다 그 겨울 오고 곤궁해진 오후 2시 행여 기죽지 마라 나는 새로 태어난다 뜨겁게 몸 던진 순간 함박눈이 내린다 대붕의 날개짓으로 세계를 받치던 힘 이제는 실직 앞에 허공 품는 시래기지만 절대로 기죽지 마라 당신은 아․버․지․다 ♧ 소금쟁이 - 이애자 몰입이 무섭네요 각 잡힌 스텝 보세요 달리 쟁이겠습니까만 조력자가 있네..

문학의 향기 2023.08.05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4)에서

♧ 오일장 여기저기를 돌다 들어선 고향에서처럼 우아한 언어들은 결코 만날 수 없다 백화를 좇는 말들이 무성할 뿐 바다가 출렁이고, 따뜻한 봄날에는 굳었던 좌판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바위 같은 침묵으로 휩싸인 바닥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흔들린다 쨍그랑 쨍그랑 여기서는 엿을 파는 할아버지의 가위소리 울림이 하도 길어서 옛날 들었던 기억을 붙잡고 있으면 십 년 만에 친구를 만나는 우연도 전혀 불가능하지 않게 일어난다 각설이 타령 또한 끊이지 않고 쉼 없이 펄럭이는 포장 속에는 시장의 생존방식이 꿈틀거린다 젊은 남자가 쉴 새 없이 귤 상자를 차에서 내려놓는다 석양은 오늘도 붉게 타고 있고 ♧ 깨어나는 집 낮에는 햇살이 자주 흩뿌려졌고 새들이 날개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밤이 되면 창호지를 바른 초가집 조그만 방의..

문학의 향기 2023.08.04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완)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양철 지붕에 햇살이 튕기고 마른 발바닥으로 햇살을 밟고 있는 회색 털 사이로 파고든 햇빛이 꼬리를 잘라가고 눈알을 빼 가는 줄도 모르고 바람 따라 귀만 쫑긋거리고 있는 섣달그믐 몰려든 어둠은 산자락을 베물고 그림자를 조금씩 키우고 있는 애완으로 변해버린 야생의 본능을 바람이 쿡쿡 찔러보고 있는 한 호모사피엔스가 햇살을 밟고 서 있는 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오후다 ---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소설 ♧ 지우개 똥 ‘이별’이라고 쓰고 지우개로 문지르면 지우개도 아픈지 하얀 몸 까맣게 태우며 ‘이별’을 돌돌 감고 쓰러지네 책상 위 지우개 똥 거룩한 성자의 이름도 화려한 스타의 이름도 억만장자의 이름도 돌돌 말아 흩어져 있네 몸 문질러 지워낸 자리 하얗게 비워지네 내가 누군가의 허물을..

문학의 향기 2023.08.03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1)

♧ 시인의 말 무화과, 꽃이 나에게 말을 한다 사람들은 꽃이 없는 줄 알지만, 꽃이 너무 많아서 숨겨 두었지, 꽃이 너무 붉어서 숨겨두었지 너에게만 남모르게 보여주려고, 깊이깊이 더 깊숙이 숨겨 두었지, 너에게만 살짝이 길을 알려 줄게, 너에게만 온전히 꽃을 보여줄게, 오직 너에게만 나의 사랑을 줄게 무화과, 열매가 너에게 말을 한다 너에게만 보여주려고 숨겨둔 꽃, 너에게만 열어주려고 닫아둔 문, 너에게만 달려가고픈 사랑의 말, 너에게만 안기고 싶은 나의 가슴,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아무리 기다려도 너는 보이지 않고, 새들이 쪼아대고 뱀이 똬리를 틀어, 홀로 익어버린 사랑 터질 것만 같아 2023년 봄여름 이어도 공화국에서 배진성 ♧ 세한도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 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문학의 향기 2023.08.02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1)

♧ 게메마씸* – 김영란 섬에선 나무들도 바람의 눈치를 본다 머리채 잡혀 끌려가던 북촌마을 머귀나무도 “예”인지 “아니오”인지 끝내 답을 못했나 직립을 포기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거 봐 무자년 섬사람들의 생존의 그 화법처럼 쉽사리 꺼내지 못한 채 맴돌고만 있었지 --- *‘글쎄요’의 제주말. ♧ 시국선언 – 김연미 참을 만큼 참은 거야 내 탓이라 하지마 활성화된 DNA 생존본능을 자극해 부당한 분배 앞에서 침팬지처럼 울부짖지 가지 치고 꼬리 자르고 자연선택을 도용해 사람종 진화의 길에 약육강식도 끌어오고 분노의 유전인자를 자꾸 도태시키지 꼬리를 내리지 마 길들여지지 않을 거야 두 발로 선 피테쿠스 지혜에 지혜를 얹어 울타리 걷어치우고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 ♧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 김정숙 길 잃어야..

문학의 향기 2023.08.01

정드리문학회 제11집 '박수기정 관점'에서(5)

♧ 사려니숲 – 우은숙 눈을 뜬 숲 언저리 저녁이 둘러앉아 두고 온 당신을 달이라 부른다 속눈썹 짙은 그리움 심장이 익기까지 ♧ 섬의 섬 - 이숙경 들랑대는 된바람 한바탕 몸을 풀려나 바닷길 지워지고 하늘길 닫혀가는데 남으로 문을 연 포구 거먹구름 가득하네 그 섬에 닿고 싶어 범섬 배지느러미에 그 섬을 품고 싶어 섶섬 가슴지느러미를 사나흘 격랑 속에서 섬을 붙드네, 서귀포 ♧ 제비 – 이태순 쉿! 저기 봐 제비가 새끼를 품고 있어 밥 냄새가 번지는 서귀포 어느 저녁 처마 밑 세 들어 사는 몸 부비는 저 식솔 ♧ 봉봉, 한라봉 – 변현상 한라봉을 까먹으며 봉 먹는 줄 모르다니 기회다 영끌이다, 아파트가 봉 된다는 봉이야! 봉 잡아라! 봉에 빠진 숱한 봉들 처음엔 탱자였지 아니 유자였었나 탱자가 유자였고 유..

문학의 향기 2023.07.31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3)와 누리장나무 꽃

♧ 다시 집으로 레일 위를 미끄러지는 금속성 경적이 사라지자 지하철이 바로 내 발 앞에서 멈춘다 사람들이 우르르 지하철 밖으로 터져 나오고, 그 숫자만큼의 사람들이 지하철 안으로 구겨진다 오후 세 시의 지하철 안은 조용하다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습관적 피로가 묻어 있다 창 너머로는 허약하고 얕은 건물이, 술 권하는 광고의 남자 배우가 빠르게 지나간다 지하철이 터널로 들어설 때는 먼지를 뒤집어쓴 천장의 전등들이 짓누르는 어둠에 일제히 저항한다 어떤 사람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책을 가방 속으로 밀어넣는다 아무도 무엇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디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지하철 안의 둥글게 휘어 있는 벽면 틈으로 종착점임을 알리는 여자 아나운서의 음성이 새어 나온다 사람들은 모..

문학의 향기 202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