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1625

제78주년 광복절 아침에

열대야로 엎치락뒤치락 뒤숭숭한 밤을 보낸 이 아침에도 여전히 밝은 해가 떠올랐다. 뒤돌아보면, 동양이나 서양이나 약육강식(弱肉强食)으로 점철되어 온 인류역사. 야수(野獸)보다도 못한 인간 본성이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양심은 지니고 있어야 하고, 상대를 ‘인간이하’ 취급하며 야만스럽게 행동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여야 하며,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머리를 숙일 수 있어야 같이 살아갈만한 이웃이 되는 거다. 아직도 강대국에 붙어 아첨이나 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그네들에게 빌붙어 꼭 지나간 굴욕의 역사를 묻어야 하는가, 참으로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인 아침이다. 오늘 그 치욕의 역사 속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찾으려던 선열들에게 무슨 낯짝으로 고개를 들까. ♧ 그날이 오면 - 심훈 그 날..

문학의 향기 2023.08.15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2)

♧ 오이도행 버스 – 이기헌 저 버스를 타면 나는 오이도에 갈 수 있다 그토록 쉬운 일을 왜 모르고 세상을 살았을까 터벅터벅 집으로 가는 사거리에 멈추어 서서 문득 내 앞을 스쳐 지나는 오이도행 버스를 바라본다 꿈처럼 날아갈 수는 없는 것 막연히 그리워만 했던 그 낯선 곳에 마음을 묻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어쩌면 홀연히 저 버스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간절히 가려 한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떠나리니 ♧ 상사화 3 – 임승진 죽을 만큼 보고파도 만날 수 없어 사무치게 여위어 홀로 피는 꽃 잡힐 듯 멀어져 가는 이별이지만 떠나지도 못한 채 피고 짐이 하나이더라 ♧ 소나기 – 성숙옥 즐거운 비가 옥잠화의 꽃대를 길게 세운다 후드득, 바닥이 푸석거리고 투명한 소리의 화음이 후덥지근한 세상을 관통..

문학의 향기 2023.08.13

양동림 시집 '여시아문'의 시(1)

♧ 시인의 말 완생을 꿈꾸는 미생에게 바칩니다. 2023년 8월 2일 ♧ 바둑 내 돌 하나 날라다 놓으면 너도 하나 날라다 놓고 내 집 한 채 지을 때 너도 집 한 채 지으면 그럭저럭 서로 살자고 할 것을 내 살려 터 닦은 곳에 자네가 돌 하나 탁 던져 놓으면 나도 자네 집터에 돌 던지고 싶고 이러저러 서로의 집이 부서지고 깨지고 나 한 번 자네 한 번 흑색이고 백색이고 서로 담장에 색칠만 달리해서 둥가둥가 어울려 살면 될 거인데 어허라 싸우고 어우러지고 힘센 놈이 이기는 게 그런 게 세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슴 아픈 집 없이 떠도는 설움 반반한 내 터에 내 기둥 하나 세워 한 계절 흐르니 그대 또한 한 계절을 기둥 세워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마주 보고 내 다시 기둥 세우고 그대 또한 어우러지니 잔잔한..

문학의 향기 2023.08.12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3)

♧ 농막일기 - 오영호 한라산 정기서린 금월길 69번지 두 칸 연담별서*를 사철 경호하는 귤나무, 감나무 비파 모과 황칠 두릅나무 연통이 끌어안은 회색 벽 바로 앞에 녹슨 문 덜컹거리는 돌벽 창고 하나 서로가 쳐다만 볼 뿐 한 마디 말이 없는 각색의 사람들이 농막에 찾아들면 낡은 카세트의 클래식 선율 따라 추사와 괴테 장자 소월이 책장을 걸어 나오고 방안을 가득 채우는 오가는 말의 향기에 참새 직박구리 입 닫고 나무에 앉아 귀 세워 풍류(風流)를 즐기는지 떠날 줄 모르는 꽃샘추위 물렀거라 자투리 흙 가슴에 호박 고추 상추 가지 무 배추씨 심어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웰빙 밥상을 꿈꾸고 설레는 5월 바람이 가다가 돌아오듯 짙은 귤꽃 향기에 발 멈춘 그대여 꿀벌들 윙윙 소리에 온 섬이 분주하네 물외** 냉국으..

문학의 향기 2023.08.11

'정드리 창'에 비친 좋은 시조 10선(2)

♧ 기왕 – 김수환 기왕이라는 왕 있었네 슬픈 왕이 있었네 이래도 저래도 슬플 뿐인 거였다면 그 세월 나랑 기쁘고 나하고 슬프지 어차피 빈 배로 갈 거 같았으면 먼지같이 가볍게 그늘같이 숨어 있을 나 태워, 없는 듯 가지 나를 좀 데려가지 한 겨울 마음만 남아 눕지도 못하는 마른 풀처럼 외로울 거면 나하고 외롭지 곧 녹을 숫눈과 같이 사랑할 거면 나랑 하지 그도 저도 아니면 징표라도 주고 가지 어느 날 아무 때 목줄 하나 주고나 가지 나와는 멀고 먼 폭군 기왕이라는 왕이 있었지 ♧ 결 - 공화순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무늬들 나무의 결 같기도 하고 물의 흐름 같기도 하고 지나온 시간의 부름켜, 누군가의 궤적 같은 어쩌면 내 안에도 수많은 흔들림이 흐르다가 멈추며 몸을 켜고 있겠지 결이 더 치밀할수..

문학의 향기 2023.08.10

월간 '우리詩' 8월호의 시(1)

♧ 고래는 죽지 않는다 – 장문석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야 같은 물속에 산다고 툭하면 육법전서를 들이대는데 우리 그 따위 그물망에 걸리지 않아 말하자면 너희들과는 근본적으로 혈통이 다르다는 얘기지 아마 보았을 거야 너희들의 아가미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창공을 향해 분수처럼 치솟는 무지갯빛 허밍 코러스를 물론 우리에게는 암흑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바다의 치안이 부실해진 틈을 타 무법천지로 날뛰며 우리 족속의 등줄기에 사정없이 작살을 내리꽂던 그 엄혹한 중세를 우리는 역사서에 꼼꼼히 적어 놓았지 우리 조상의 내장과 지방질로 짜낸 등불을 밝히고 성스러운 살점을 뜯어먹던 적들의 만행을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권토중래를 노렸는지 아는지 모르겠네 얼마 전 새로운 법령이 공포된 것을 거기에 금박..

문학의 향기 2023.08.09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5)에서

♧ 대장장이의 망치질 날씨가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망치질 소리는 여전히 크게 들린다 들어서는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망치질에 열중인 대장장이의 눈은 알게 모르게 붉은 물이 든 지 오래다 소리와 소리가 격렬히 부딪치는 망치질에는 대장장이의 오랜 기원도 함께 섞여있음이 틀림없다 이유 없이 하늘이 흐린 날에는 대장간 구석에 쌓여 있는 낫들이 세상의 ‘악’을 자르는 ‘칼’들이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춤을 춘다 대장장이는 하루도 쉬지 않는다 터지는 불빛을 보며 쇠를 달구고 거친 망치질로 생애를 담금질한다 빠르게 쌓이는 권태를 물리치면서 ♧ 사막을 걸으며 회색빛 바람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팽이처럼 돌다 멈춘 모래 알갱이들이 자잘하게 움푹 팬 구멍에서 멈추었다 발걸음에 수평이 허용되지 않아도 시커먼 구름이 하늘에 떠돌아..

문학의 향기 2023.08.08

배진성 시집 '서천꽃밭 달문moon'에서(2)

♧ 심우도 심우도(尋牛圖) 속으로 걸어간다 나의 흰 소는 보이지 않고 검은 소들이 있다 소들이 소나무 아래 모여 있다 멍에도 꼬뚜레도 없다 숲에서 뜯어먹은 풀을 되새김질하며 서로의 눈빛을 본다 서로의 등을 핥아주는 소도 있고 죽비처럼 꼬리로 엉덩이를 치는 소도 있다 새로 발견한 풀밭을 알려주는지 귓속말을 속삭이는 소도 있고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소도 있다 나도 소를 길렀다 나는 늘 길을 들이려고 했다 내가 기르는 소는 코뚜레를 하였고 멍에를 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다 갱본에서 쉬는 동안에도 말뚝에 박혀 있어야 했다 나의 소는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보지 못했다 나는 흰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생각만 하였다 소와 함께 놀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내가 소를 업어 줄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소들이 다시..

문학의 향기 2023.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