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2023/07 31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2)

♧ 행방 - 김병택 겨울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세상 여기저기 떠돌던 탁한 소리들이 초가집 등불 앞에 기립한 채로 모여들었다 심심할 땐, 쉰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일부러 가사를 바꾼 ‘렛잇비’를 낡은 집 뒤뜰에서 여러 번 불렀다 억지로 들판을 건너는 일과 다름이 없었다 매일 바라보는 산은 어느 날, 어느 시간에도 성직자처럼 낮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무에 앉은 매미들이 합창소리와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이 함께 바다 속으로 우르르 물러가곤 했다 메마른 산등성이를 달리던 노루가 웬걸, 아득한 공중을 향해 뛰어올랐다 요즈음과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의 이념 금속성의 연설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제, 한 톨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 밥심 – 김순선 오랜 세월 견디어 온 고목 같은 식당 이름 식..

문학의 향기 2023.07.23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4)

♧ 새들의 저울 - 김명숙 새들에겐 저울이 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은 발바닥 저울을 믿는다 무게를 재지 않아도 중심을 잡고 사뿐히 내려앉는 저 믿음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날개가 추락한다는 걸 알기에 그들의 믿음엔 흔들림이 없다 세상의 부모는 사랑을 무게로 재지 않는다 자식의 일 앞에서는 윤리 도덕이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잠시 잠깐 휘청대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처럼 헌신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 순간의 꽃 - 나병춘 돌에도 꽃이 피랴? 종일 돌아 앉아 돌덩이인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햇살이 다가와 꼭 껴안아 주자 그늘에만 숨던 마음 화사하게 풀어놓는다 어디선가 흰나비 하나 위로하듯 어깨에 사뿐 앉는다 뜬금없이 나비가 떠나가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오붓한 순간 꽃자리 그 ..

문학의 향기 2023.07.22

정드리문학 '박수기정 관점'에서(3)

♧ 폭포 속으로 1 – 안창흡 -화가 강요배 선생의 畫題에 부쳐 쾅 쾅 쾅 내리친다 다시 보니 솟구친다 저 폭포수 탄식인가 해탈에 든 희열인가 물 미르 하늘 오르고 심연으로 뿌리박히네 ♧ 산방산 – 고해자 세간에 오름 붐이 일기도 아주 전쯤 저 자락 틈새 사이 오르고 내리던 중 그 길목 아킬레스건 길조차도 불호령 널따란 바다 향해 시선 다 빼앗긴 채 기슭이 험난함에 사람조차 접근 막고 산남의 수문장처럼 다가서도 못하네 희미한 쪽길 내듯 오르고 내려오다 납작한 편무암들 급경사로 위험신호 올올이 시간만 쌓는 저 외로운 산방산 ♧ 소원 – 윤행순 수산봉 떡구름이 유원지에 내려왔다 오래전 외과수술 받은 외삼촌처럼 한 번만 살려달라고 말도 못한 저 곰솔 ♧ 송강 은배 - 양시연 배고픈 건 참아도 술을 어찌 참을까..

문학의 향기 2023.07.21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에서(1)

♧ 시인의 말 시집 『벌목장에서』를 발간한 이후부터 최근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시들과 틈틈이 써서 서랍에 넣어둔 시들을 꺼내 한데 모았다. 세상의 어느 시집에서도 완벽한 시를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시를 쓰려는 시인의 노력이 숨 쉬고 있을 뿐이었다. 2023년 유월 김병택 ♧ 달 높이 떠 있으면서 속속들이 사람들의 그리움을 품은 뒤 늘 구름과 함께 돌아다니는 내 일상의 구석까지 스며든다 애써 곰곰이 과거를 되살리면 수평선을 넘으려던 내 꿈을 막은 이유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밤에는 고향 마을의 숲을 가로지르며 새들과 함께 부르던 옛 노래가 긴 음파에 실려 내 귀에 들려온다 사방이 거칠게, 크게 흔들려도 휘황하게 뜬 밤하늘에서는 어두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쉼 없이 하루 내내..

문학의 향기 2023.07.20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6)

♧ 어느 날․7 -바닥 도로가 움푹 파여 빗물이 고였다 어디에도 스미지 못하고 흐르지도 못하고 고인 빗물 같은 사람들 새벽마다 드럼통 불꽃만 바라보며 꾸역꾸역 모여 있다 누렇게 고인 빗물 속에도 맑은 하늘이 들어와 앉았다 ♧ 어느 날․9 -미호천에서 하늘이 산머리를 쓱 베어 먹고 구름으로 덮어 놓았다 그 앞으로 기러기 떼 줄 서 있고 미호천 갈대밭은 쏴아쏴아 연신 몸 씻는 소리만 내고 ♧ 어느 날 · 10 -폭설 산골 마을에 적막이 쌓이네 솔가지 몸 털 때마다 적막이 적막을 깨네 산 너머 도시 요란한 소음들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하얀 적막으로 내리네 ♧ 노을 구름은 하늘에 고인 물 서쪽 하늘은 거대한 호수 붉게 끓는 호수 지평선 팽팽한 저녁 비행기 하나 노를 젓는다 ♧ 탱자나무 울타리 마알간 하늘로 참새 ..

문학의 향기 2023.07.19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1)

♧ 우토로 마을의 먹구슬나무 – 강덕환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정 51번지 일대 혐오의 방화가 저지른 냉대의 터에 타다 남은 벽이며 기둥, 함석지붕 살갗이 벗겨진 먹구슬나무 살림살이 흔적들 고스란한데 웬걸, 그 옆 다른 가지 새 이파리로 살아 버티고 있었다 먹구슬나무야! 고맙다 연보랏빛 꽃이 피고 금빛 열매 맺기를 두 손 모아 으라차차 응원하는데 하필 그 순간 불에 타고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4․3을 증언하는 선흘리 후박나무가 생각났을까 소개령으로 텅 비어버린 동광리 무등이왓이 떠올랐을까 차별과 편견의 당에도 쉼 없이 새 생명은 돋아날 터이니 현해탄을 넘나들며 평화의 박씨를 심는 찬란한 금빛 그 제비배지를 동백배지와 함께 단다 ♧ 꿩ᄃᆞᆨ세기 – 강봉수 풀 덤방ᄒᆞᆫ 낭강알 오시록헌 디 꿩ᄃᆞᆨ세기가 빈..

문학의 향기 2023.07.18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와 누리장나무 꽃

♧ 커피국 - 송연숙 청춘의 열정처럼 식지 않고 미국으로 이민 간 고모는 해마다 소고기와 말린 바나나와 원두커피를 보내왔다. 할머니는 양은 냄비에 된장국처럼 커피를 끓였다. 끓인 커피 맛을 보며 설탕을 한 숟가락씩 추가하였다. 설탕 맛이 쓴 커피 맛을 덮을 때 둘러앉은 식구들에게 한 대접씩 배당된 커피 커피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들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밤새 두근거리며 울타리 뛰어넘는 양을 세다가, 똘똘 말린 구름을 깎다가, 빽빽하게 별이 뜬 아메리카를 상상하다가 뒤척이는 할머니의 등과 어깨가 심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그때 비밀처럼 보고 말았다. ♧ 마지막 체온 – 윤태근 삼 년 전 칠순을 넘긴 아내는 베옷으로 곱게 단장을 하고 하얀 국화 송이송이 사이에서 공주처럼 잠들어 있습니다 미친 듯 엄마 엄마..

문학의 향기 2023.07.17

'혜향문학' 2023년 상반기호의 시(5)

♧ 아이야, 나무처럼 - 한희정 비탈 선 나무들은 제 스스로 중심 잡는ep 휘면 휜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돌 움켜 생사를 넘듯 뿌리를 내린단다 이따금 언쟁에도 함께 사는 법을 배워 재촉하지 않아도 스스로 피고 지는 때 되면 몸살을 앓던 산벚꽃도 환하다 아이야, 흔들릴수록 중심을 찾아가지 곶자왈 나무처럼 네가 선 그 자리에 꿈 찾는 이역만리가 발아래 버틴단 걸 [초대작품] ♧ 탱자나무 울타리 – 민병도 -추사적거지에서 참새가 포록포록, 낮달이 조는 빈집 자신이 가시인 줄 탱자나무는 모른다 한 번도 자신을 찔러 피 흘린 적 없기에 북소리 기다리는 결의에 찬 병사처럼 어깨동무 결연해도 아, 먼지만 쌓인 댓돌 절며 온 파도 소리를 애써 돌려 보낸다 긁힌 햇살, 찢긴 바람 놓친 줄 알면서도 마당가를 서성이는 발..

문학의 향기 2023.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