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길 – 정지윤 멀리서 종소리 꽃나무를 흔든다 능선을 자르며 떨어지는 꽃잎들 꽃들이 떨어질 때마다 새들이 날아오른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래가 출렁거린다 언제나 나에게만 들리던 그 노래 망초가 하얗게 흔들리고 시간이 우거져 있었다 ♧ 불란지 – 양희영 청수리 곶자왈로 반딧불이 찾아간다 캄캄한 더듬길에 소리도 불빛도 끄고 내 어둠 거두어가는 그 웃뜨르 꽁지들 --- *이상 두 수는 ‘제주를 노래한 시’. ♧ 씨앗의 힘 - 문순자 서울 사는 둘째가 카톡카톡 날 부른다 전시회에 왔다며 보내온 사진 한 장 “이건 뭐?” 내가 묻자 그만 울먹거린다 오래된 주문처럼 여섯 개의 유리병엔 홍두 메밀 흑보리 자색보리 갓 참깨 코르크 마개로도 못 막은 돌아가신 할머니 냄새 만지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좀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