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2023/05 30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은'(3)

♧ 해녀할망 아직도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다 절대로 난 안 죽을 거야 팔십다섯까지는 물에 들고 싶다던 해녀할망 물 일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었던가 눈발이 세차게 퍼붓던 어느 겨울날 테왁만 바다에 둥둥 떠다녔다 어서 물 위로 올라오세요 목숨줄 테왁도 없이 어느 바다를 헤매시나요 테왁 주인 찾으러 거센 바다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간절함은 먹빛 되어 돌아왔다 다시 잔잔한 바다는 수런거렸다 아이고, 우리 할망 올라와서 참 착ᄒᆞ다 이 사람 저 사람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이렇게 올라왔구나 바다는 다시 물알로 물알로 외치고 돌고래 같은 설움만 휘몰이로 감겨진 해녀할망 끝끝내 손 놓지 못한 마지막 미역 한 줌 ♧ 오징어 말리는 시간 내 삶은 거친 물살 지나간 물밑이다 빨랫줄에 켜켜이 배어나온 소금기는 조금씩 빠져나..

문학의 향기 2023.05.23

시인 오승철을 추모하며

그 동안 어쭙잖은 이 블로그를 주옥같은 작품으로 밝혀주던 문우 오승철 시인이 숙환으로 우리 곁을 떴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가족들과 서귀포와 문우들 모두 두고 떠났다. 이제는 마지막 작품집이 돼버린 ‘다 떠난 바다에 경례’ ‘시인의 말’에 ‘상군해녀였던 어머니도 떠나’고 ‘저 텅 빈 바다에 무엇을 바칠까 하다가 그냥 거수경례나 하고 돌아간다.’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길을 떠났다. 이제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시의 행간을 살피며 기꺼이 그를 보내드리려 한다. 삼가 명복을 빈다. 고통이 없는 세상에서 영면하기를… ♧ 저 말이 가자 하네 사진작가 권기갑의 말 한 마리 들여놨네 고독은 고독으로 제련하란 것인지 삼백 평 눈밭도 함께 덤으로 사들였네 십년 넘게 거실 한켠 방목 중인 그 말이 불현듯 투레질..

문학의 향기 2023.05.22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3)

♧ 목백일홍 분홍분홍 - 황현중 어릴 적 나는 공부를 지독 못했다 시험지에 늘 날카로운 사선 가득했으니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살갗에 칼날 스치는 것처럼 아프지만 딱 한 번뿐이었던 내 인생의 환희 오답을 정답으로 내 시험지를 사선 대신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가득 채우시며 너는 오답이 아니야, 하시던 아픈 그때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 나머지 공부로 저물어 가는 창 너머 내 가슴 파고들던 분홍분홍 목백일홍 어려운 이 세상 나는 여전히 오답으로 살기에 바쁘지만 오답의 눈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답 목백일홍 분홍분홍 ♧ 꽃 몸살 – 강우현 병점성당 벚나무 아래 응답받지 못한 기도만 서성이는 저녁 꽃들의 유혹 고봉이다 죄인처럼 고개 떨군 로만칼라는 무슨 방패로 막아내느라 게으른 일꾼처럼 걷나 ..

문학의 향기 2023.05.21

계간 '제주작가' 2023년 봄호의 시조(4)

♧ 터 – 이애자 방파제에 나앉아 바다를 바라다보네 힘차고 경쾌하고 빠르고 간결하게 한 무리 돌고래 떼가 음표처럼 지나가네 오물락이 들어갔다 오물락이 나왔다 해녀도 오물락 돌고래도 오물락 저들도 젖먹이끼린 호흡이 맞나보네 모슬포 앞바당에 돌고래가 산다네 모슬포 앞바당에 바람이 산다네 바람도 돌고래들도 주파수가 통하나 보네 귀신풍차 모셔다가 바람팔이 한다면 우왕좌왕 돌고래 떼 소통장애 생긴다면 이 바당 혼디 나누멍 느영나영 살아질까 ♧ 구피*의 하루 - 장영춘 온종일 어항 속 태평양을 건너듯 출구 없는 레일 위를 돌리고 돌려도 또다시 제자리걸음 그물 속에 갇힌 오늘 한때는 네 어머니도 종종걸음치셨지 한여름 용천수에 발 한번 담글 새 없이 어머니 움푹 팬 발자국 이끼처럼 떠 있는 --- *구피 : 열대어 ♧..

문학의 향기 2023.05.20

아르메니아 세반호수와 반크 수도원

♧ 2023년 4월 15일(토)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가 세반호수(Lake Sevan)로 향했다. 세반호수는 해발 1,905m의 분지에 있는 호수로 수심이 깊은 84.6m의 주 호수와 남동쪽에 자리한 수심 39.3m의 볼쇼이 세반으로 나뉜다. 면적은 1,360㎢으로 바다가 없는 내륙국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끼는 바다 같은 상징적인 호수다. 파도도 치고 갈매기가 날고, 송어 같은 많은 물고기가 있어 주변 주민들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한다. 아르메니아에는 많은 호수가 있지만 이 호수는 수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오염방지를 위해 많은 힘을 기울인다고 했다. 이 호수는 멀리 보이는 여러 설산에서 흘러온 물과 지하수가 용출되어 수위를 유지하는데, 라진강을 통해 아락스강과 카스피해로 흐르지만 대부분은 증발한다. ..

해외 나들이 2023.05.19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1)

♧ 손말 - 양시연 오십 대 중반에도 저렇게 예쁠 수 있다니! 그녀가 다녀간 날은 어김없이 비가 왔다 여태껏 한마디 말도 세상에 못 내뱉어본 그랬다 농아였다, 선천성 농아였다. 여성상담하는 내게 무얼 자꾸 말하려는데 도저히 그 말 그 몸짓 알아듣질 못했다 나는 그날부터 수어手語 공부 다녔다 기어코 그녀의 말, 그 손말을 알아냈다 그렇게 하늘의 언어 아름답게 말하다니! ♧ 어느 등짝 - 김미영 누가 이 섬 안에 부려놓은 바위인가 녹동항 배에 실려 아버지 등에 실려 열세 살 소년의 눈에 여태 남은 어느 등짝 여기까지 업고와 등을 돌린 그믐달 칠십년 흘렀지만 단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운 서울 한쪽 창파에 떠 있지만 소록소록 소록도 한센병의 섬에도 연애질은 있었나보다 눈 한쪽 귀 한쪽 없어도..

문학의 향기 2023.05.18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2)

♧ 용수리 거욱대* 배냇냄새 그리울 땐 화성물 찾아간다 모나고 거친 돌이 몇 백 년 버티면서 비명도 절규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노략질 바다에서 내몰리고 쫓긴 날들 우금 하나 쇠솥 하나 탑 속에 묻으면서 만선의 제사상 위로 표류기를 다시 쓰네 그 여름 태풍일까 자연의 신비일까 사납던 매부리는 세월에 깎여지고 얼굴엔 소금 꽃 몇 점 하얗게 피어 있다 이 세상 누구인들 바란 대로만 살아가랴 빌엄수다 빌엄수다 밤새워 기도하던 어머니 따라나선 길 대물림으로 서 있네 --- *거욱대 : 용수리 바닷가에 있는 방사탑 2호로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 둥글게 쌓아 올린 돌탑이다. ‘화성물’ 가까이에 있는 탑이라 해서 ‘화성물탑’, ‘화성물답’이라고 불리며, ‘답, 답단이, 답데, 거욱, 거욱대, 가마귀 동산, 매조재..

문학의 향기 2023.05.17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2)

♧ 봄 - 김미외 나무는 언제나 볼 수 있는 거라 생각했어요 새순 돋은 잎이 무성해지고 초록이 노을빛으로 스며드는 거라 생각했어요 본다,라는 말이 어찌 이리 아린지요 눈 한번 깜박이면 세상을 다 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동공을 크게 뜨면 꽃이 피고 어느새 손바닥에 꽃이 올려져 있으니까요 꽃을 빤히 들여다보려니 눈이 아파와요 이 통증이 과연 눈에서 오는 것인가, 그러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깜깜한 어둠 걸음이 멎고 울음이 흔들려요 검은 나무 검은 꽃 그리고 검은 당신 봄이 멈추고 빛이 사라져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지 두 손을 비벼 손바닥을 두 눈에 대고 마법을 걸어요 괜찮아, 눈을 뜨면 여전히 나무를 볼 수 있을거야 봄은 내게서 떠나지 않을 거야 ♧ 영점사격 - 김성중 버스에서 내려 배를 타고..

문학의 향기 2023.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