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2023/05 30

계간 '제주문학' 2023호 봄호의 시조(3)

♧ 김유정역을 지나며 - 김영란 수줍은 사랑고백처럼 생강나무 꽃 피어요 옴팍한 떡시루 같은 봄·봄 실레마을 야윈 목 앓는 소리로 노란 꽃이 피었어요 청량리 경춘선 타고 배웅하는 봄바람 그토록 살고 싶던 스물아홉 생의 벼랑 유정도 유정하여서 역으로 남았을까요 받지 못한 답장처럼 삼월에 눈 내려요 점순이 고 가시내는 닭갈비를 판다네요 그대는 마지막 편지 누구에게 쓸 건가요 ♧ 움파야 – 김영숙 -자살미수사건 판결문을 보고 들려줘 남은 너의 이야기 우린 그게 궁금해 속대 노란 오늘은 많이 아플지 몰라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네가 쓸 페이지를 ♧ 하류 예감 - 김정숙 갱년기가 사춘기보다 몇 배 더 무섭다며 몰아치고 휩쓸리며 혼미한 정신 들쑤실 때 누가 나 정리 좀 해줘요 끝도 없는 NO년기 ♧ 봄의 설계도 - 김..

문학의 향기 2023.05.15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5)

♧ 단풍나무 유월의 녹음 속에서 붉게 타오르다 기다림으로 서 있는 사람 햇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만첩빈도리 꽃 달콤한 향기에 취해 기다림으로 붉게 서 있는 사람 ♧ 종소리 구월 볕이 쟁쟁거리던 날 증명사진 찍으러 사진관에 갔다 30분 후 나온다 하여 시장을 기웃거리다 국수 한 그릇 먹었다 성당 앞을 지나는데 이명 같은 종소리 들린다 열두 시를 알리고 있다 밀레의 만종 화폭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묵도의 시간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온 애수에 젖은 종소리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총총히 사라져 여운 속으로 걸어간다 ♧ 참회의 시간 물빛 사이로 해초들이 아롱거리는 이른 아침 게 한 마리 갯가에 나와 귀여운 아기 고양이 같이 앙증맞은 세수를 한다 물결이 그림자 같이 다가..

문학의 향기 2023.05.14

아제르바이잔, 칸의 여름궁전

쉐키(Sheki)라 불리는 곳은 뒤쪽에 나지막한 산이 둘러싸여 있는 도시로 제일 위쪽에 ‘칸의 여름궁전’이 위치해 있었다. 조그만 개울을 건너 바로 옆에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위치해 있어 이곳이 그 궁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관광지로 보인다. 아래로 쭉 늘어선 기념품점을 위시한 상가에 극장도 있었다. 여름궁전이어서 언덕 제일 위쪽에 위치해 있던 후세인 무스타드왕의 여름궁전은 둘레에 왕의 궁전답게 튼튼한 성을 쌓았다. 1762년에 지어진 2층의 목조건물이었는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후문을 통해 들어서면서 건물 양쪽에 커다란 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우리들을 압도한다. 이쪽 코카서스 3국이나 우즈베키스탄을 돌아다니면서 공원이나 가로수로 많이 보았던 나무다. 잎과 열매가 플러터너스 같았는데, ..

해외 나들이 2023.05.13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의 시(1)

♧ 시인의 말 귀울림이 심한 날 용수리를 발음해본다 부딪히는 어머니 말, 자나미로 밀려오면 곱숨비질 건너에서 호오이 소리가 매조제기에 떠돈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바다 너머 풍경은 그렇게 모두 되돌아온다 어두운 생(生) 환히 밝힌 어머니를 통해서… 2023년 5월 김신자 ♧ 풀바른 구덕* 일생이 마디라서 부러질 줄 몰랐네 빳빳이 풀 먹이고 단정히 펴 바르면 두어 평 남루한 마루 알록달록 환했네 천조각 뜯어내어 상처들 덮은 무늬 상웨떡 담긴 모습이 꿈처럼 번지는 건 자식들 뒷바라지한 어머니 흔적이네 몇 번을 덧바르면 가난도 말라붙고 쥐오줌빛 얼룩들이 서성대다 멈출 때 무뚱에 졸음 한 짐을 들고 오던 겨울 햇살 --- * 풀바른 구덕 : 대바구니가 헐어서 종이나 ..

문학의 향기 2023.05.12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1)

♧ 바람꽃 - 임미리 천지에 바람 소리 가득한 날 꽃잎, 소식 한 줄 전하네요. 바람 불어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부드러운 꽃잎 사이로 한 움큼의 향기 붉어져 그대에게 살며시 스며드네요. 나를 바람꽃이라 불러주세요. 세월 흘러도 잊지 않을 향기처럼 꽃의 화신으로 남을게요. 그대에게 영원히 머물 수 있기를 세상에 흔들려 형체를 잃어버려도 온몸으로 그대 감싸 안으며 천년인 듯 향기롭게 피어나기를 바람이 불러주는 노랫소리 천지가 온통 바람꽃이네요. ♧ 인디언 질경이 – 장문석 질기고 독하다는 말, 빈말이라도 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우리 땅 빼앗았잖아요 짓밟고 또 짓밟았잖아요 수수만년 사원이자 신전이었던 숲, 그 영험에 불을 지르고 사냥하듯 총질까지 했잖아요 숲의 정령들이 구천을 떠돌고 별들의 춤사위가 고꾸라졌어요 ..

문학의 향기 2023.05.11

계간 '제주작가' 2023 봄호의 시조(2)

♧ 열 밤 자민 - 이애자 아이는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고 어머닌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고 제삿날 세고 샌 날도 희끗희끗 새어서 한 다리 건너 열에 아홉이 사삼유가족이라 고조모 총살에 가고 고모할망 행방불명이라 깊게 팬 슬픔조차도 허락지 않던 사월이라 오메기술 ᄒᆞᆫ 잔 두 잔 술기운이 오르면 제삿날마다 괜히 긁어대던 오촌당숙이 그토록 깽판을 놓고 풀어야 했던 응어리라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제사에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사에 성할망 혼절하고야 끝을 보는 제사에 애기고사리 열 밤 스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할미꽃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삿날 동동 기다려 열손가락 꼽는 봄 ♧ 한라산의 겨울 – 장영춘 추울수록 뜨거워지는 ..

문학의 향기 2023.05.10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4)

♧ 위로 대문을 나서는데 반짝 눈길을 붙잡는다 흙이라곤 한 줌도 보이지 않는 시멘트와 시멘트 사이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을까 민들레 한 송이 빙그레 웃고 있다 흙 한 줌 없는 그곳 그 좁은 사이를 ♧ 감사한 하루 비행장 철조망 따라 철길 같은 데크길 걷는다 망루 바라보며 살랑대는 들꽃들과 눈인사하며 실루엣 같은 바람 슬며시 스쳐 지나가는 길에 포로롱 참새 한 마리 철조망 사이를 날아간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연들 구름 따라 흩어지는 시간 큰 바위 얼굴 같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절로 감사하고 싶은 하루가 지나간다 ♧ 노란 엽서 도서관 창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밤새 도착한 노란 엽서들 어디서 날아온 사연들인지 눈이 부시다 오가는 사람 뜸해 아직 배..

문학의 향기 2023.05.09

거위와 오리가 노니는 못을 보며

♧ 2023년 4월 15일 맑음 아르메니아에 입국하여 세반호수로 가는 길에 어느 전원에 위치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여유가 있어 나와 못가에 섰는데, 그 집에서 가꾼 정원 같은 100평 남짓의 연못에서 아름다운 백조들이 물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것을 보고 신기해 가까이 다가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다가가 바라보니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는 내 눈에는 거위와 오리로 보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그 모습이 아름다워 폰으로 몇 컷 눌렀다. 이곳 사람들은 우리보다 소득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히 여유로워 보인다. 비행기에서도 공항에서도 거리에서조차 마스크 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우리보다 훨씬 행복지수가 높은 사람들을 보면서 물질적인 것을 너무 추구하는 것도 자꾸만 초조해 하는 것도 불행의 원인인 것 같아 부끄..

아름다운 세상 2023.05.08